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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03 봄날은 간다 (2001, 허진호 / 유지태, 이영애) 1
posted by 박과장 2012. 5. 3. 01:19

 

 감정의 유통기한은 어디까지인가요.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은 누구나 주목합니다. 아름답고, 빛나고, 설레는 그런 날들이니까요. 모든걸 집중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언제 우리는 사람을 잊고 언제 우리는 만나지 못해도 괜찮아지나요.

 제목부터 봄날이 가버렸다니 좀 슬픕니다. 사실 우리는 봄날이라는 단어를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이야기할때 사용합니다. '왕년'같은 개념이죠. 글을 쓰는 오월 초에 날씨가 너무 더워서 봄날이 가버린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런 용법은 아닐거에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녹음실에 다니는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는 지방을 다니면서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강릉에 있는 방송국 PD인 은수(이영애)와 함께. 같이 여행을 하게 되는 일이라서인지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한편 상우의 아버지는 일찍 상처했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진즉 작은마누라를 얻어서 나간 남편을 잊지 못해 매일 매일 기차역으로 옷을 정갈하게 챙겨입고 나갑니다.

 한창 아름다운 사랑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장가가라는 가족의 압박도 있고 해서 상우는 은수에게 아버지에게 인사를 가자고 이야기하는데,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이게 엄청나게 부담스럽습니다. 말을 돌리고, 말을 돌리다보니 마음이 상하고, 닫히게 되고, 한 달만 떨어져있자고 상우에게 이야기 하게 되죠. 그 와중에 자연스레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결국 상우에게 이별을 통보하게 됩니다.

이후 상우는 좀 망가집니다. 술에 잔뜩 취해 찾아가기도 하고, 은수가 새로 뽑은 차를 긁어놓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죠. 다니던 녹음실을 때려치려고 하기도 하고.

그렇게 서로 안보게 된 두사람, 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어느날 은수가 자신의 삶에 상우가 꽤 큰 의미였는지 알게 됬거든요.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하는 그녀 앞에 서 있는 상우는 사실 그 때의 상우가 아닙니다. 충분히 상처받았고 그녀에게 정이 떨어졌으니까. 다시 시작해보려고 하는 은수를 잘 떨쳐냅니다.

 "봄날은 간다"는 관계의 시작보다 그 끝에 초점이 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한거죠.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은수와 상우가 극의 절정부에서 이별을 맞이하게 되니까요.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도 둘의 이별장면입니다.

- 헤어지자.

- 내가 잘할게.

- 헤어져.

- 너 나 사랑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상우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사실은 변하지만(마지막에 은수를 다시 잡진 않잖아요) 그의 세계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매일 곱게 차려입고 기차역으로 나가는 상우의 할머니나 이른 나이에 상처했지만 재혼하지 않는 그의 아버지를 보세요. 이건 상우가 환경적으로 학습한 것이기도 하고, 아버지를 닮아 조용한 그의 성품에도 잘 걸맞는 것이죠.

 그러나 은수의 세계는 그러지 않습니다. 은수는 일단 이성에게 다가가는데 큰 장벽이 없는 사람입니다. 상우를 처음만났을때 척하고 손을 내미는 모습이 그렇죠. 새로운 것에 매력을 잘 느낀다는 것은 좋아하던 것을 잘 바꾼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게다가 한번의 이혼을 통해 남녀 관게에 대한 냉소적인 생각도 묻어납니다. 사실 결혼이라는 과정까지 가는데에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을텐데 그게 무너졌으니 냉소적일 수 밖에요.

 허진호 감독은 이 둘의 감정선을 아주 내밀하게 그려냄으로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멋대로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행복'을 사랑 삼부작이라고 묶어서 부르곤 하는데, 이 세 편 모두 현실적인 상황들이 만들어내는 마음의 장벽과 뜨거운 사랑이 부딪힐 때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봄날은 간다는 극적인 장치를 가장 배제함으로서 너무나 현실적이라 가슴 아픈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이야기를 해볼까요. 원래 이영애는 현실적인 영화랑 잘 안맞는 배우중에 하나입니다. 너무 예쁜 비주얼이 그렇고, 사람들이 잘 못느끼지만 발성이 굉장히 특이한 배우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주변에 목소리가 이영애같은 사람은 정말 드물어요.

 그 목소리가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는 참 좋은데 이렇게  현실적이 영화에 어울리는가 하는 걱정은 좀 됩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허진호 감독은 굉장히 짧은 대사길이를 주었고, 이 작전은 잘 먹혀들어갔습니다. 영화 내내 이영애가 길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별로 없어요. 게다가 외모가 주는 느낌이 은수와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구요.

 제가 유지태라는 배우가 참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기 시작한게 바로 봄날은 간다입니다. 아직 소년같은 얼굴이 있던 그때의 유지태에게 이 배역은 몸에 잘 맞는 옷입니다. 느릿하지만 처절한 연기. 사랑이 분노로 뒤바뀌어 버린 상황을 어쩔줄 몰라하며 노래책을 들여다보며 '미워도 다시 한번'을 불러제끼는 장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의 얼굴들 중 하나입니다.

 조연들은 크게 비중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상우 아버지역할의 김인환씨는 아내 없이 아들을 키워온 가장이자 엄마역할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모습을 슬프지만 굳건하게 보여줍니다. 인상적인 연기에요.

 

언젠가 봄날은 오고, 때로는 가기도 합니다만, 마지막 재회의 장면에서 두 사람이 걷는 길이 벚꽃이 만개한 눈부신 장면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아이러니이자 아름다움일겁니다. 어떤 이별은 가장 아름다울때 오기도 하거든요. 그래도 전 사랑을 믿고 한번 더 슬픔을 각오하려 합니다만.

 

한줄평 : 때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일이 사랑의 종말이 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