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박과장 2018. 5. 27. 17:3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박하사탕은 이창동의 두번째 영화로, 바로 이전에 리뷰했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처럼 현대사를 겪어내는 개인의 이야기를 여러 시점에서 조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역순으로 장면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 장면은 1999년, 마지막 장면은 1979년으로 약 20년 정도의 시간 동안 60년생인 주인공 '영호'의 삶을 보여주며 왜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 초반 관객들은 영호의 행동들을 보면서 그가 내면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파탄에 이르러서 결국 기차 앞에서 죽음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계속 궁금해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거대한 '왜'라는 질문에서 영화가 출발하는 것이죠. 왜 영호는 죽어야 하는가? 무엇이 그를 괴롭게 하여 어릴적 친구들 앞에서 저 난리를 치도록 만들었을까?



결국 영화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관객들은 영호는 5.18 당시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한 소녀를 사살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소녀를 사살했다기 보다는, 그 이전의 섬세하며 사진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던 영호 본인의 자아를 파괴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영호는 전역 이후에 경찰이 되는데, 그와 애인관계이던 순임도, 그의 가족들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영호가 5.18을 전후로 얼마나 큰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고문의 가해자가 되어 피해자의 대변이 손에 묻는 장면에서 그의 손이 더럽혀지는 장면의 상징성은 그 다음 장면에서 순임의 앞에서 홍자(김여진 분)의 엉덩이를 주무르는 장면으로 더욱 구체화됩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화는 기차가 달리는 장면을 역재생해서 보여줍니다.(언뜻 보면 잘 모르지만, 화면 구석구석 내려야 할 꽃잎이 도로 올라가거나 하는 장면들이 펼쳐지지요) 왜 기차일까요? 기차는 정해진 역, 정해진 선로만 갈 수 있습니다. 현대사라는 거대한 바퀴가 굴러갈때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생존하기 위해 정해진 선로를 따라갈 수 밖에, 열차에 실려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릅니다. 자동차라면 자신의 길을 찾아 개척해 나가겠지만요. 경찰 복무 중에 술에 취해 갑자기 군 시절의 트라우마가 폭발한 영호가 자전거를 타고 술집 안을 빙글빙글 도는 장면도 비슷한 의미를 상징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다만 기차와 자전거가 다른 점은, 기차가 정해진 곳만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는 그렇지 않지만, 결국 영호는 자전거를 타고도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맙니다. 이것은 현대사 속에서 폭력을 자행한 영호가 아무런 선택권도 없지는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폭력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의 고발로 읽힙니다. 결국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었다'는 면죄부의 부여가 아니라, '현대사라는 거대한 아픔이 있었지만, 그에게 선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는 이중적인 메세지를 던져줍니다.



영호가 만나는 여인들은, 그 시절의 영호의 모습을 닮아 있는 또 다른 영호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한 여인과의 이별은 영호에게 이전의 영호로부터 작별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순수하고 이타적인 순임과 군생활을 기점으로 달라진 영호는 홍자를 선택하고, 홍자와 똑같이 불륜을 저지르지만 홍자의 불륜과 사업실패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영호는 홍자와도 이혼하게 됩니다. 중간에 빠진 여인이 한 명 있는데요, 바로 경아(고서희 분)입니다. 군산에서 순임을 그리워하는 영호를 보고 하룻밤을 보내게 되지요. 경아는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본인을 순임으로 여기고 해보라고 하고, 영호는 경아를 '순임씨'라고 부르며 미안하다고 사과합니다. 둘은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경아는 선착장에서 영호를 기다리지만, 영호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경아는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영호의 거울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불행에 대해 스스로 사과할 수 있을뿐,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겁니다.



당시 몇몇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설경구를 장편 영화의 주인공으로 세운 건 주변에서도 많은 만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의 무한 신뢰가 있었다는군요. 최근 재개봉 기념 인터뷰에서도 설경구는 '영호'가 감당하기 힘든 역할이었다고 털어놓더라구요. 설경구의 연기는 춘사영화제 남우주연상등 당대의 쟁쟁한 상을 휩쓸며 인정받습니다. 사실상 설경구에게 거의 모든 비중이 맞추어져 있는 영화지만, 역시 무명에 가까웠던 문소리나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던 김여진 역시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설경구의 호연을 돕습니다.






<버닝>의 종수, <밀양>의 신애, <박하사탕>의 영호 등 이창동의 영화는 구원받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그리고 어찌할 바 모르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영호는 기차에 뛰어들어서 돌아가고 싶다고 외치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종수는 벤을 죽이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신애는 유괴범을 마음속으로 용서하면, 혹은 죽이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창동 세계의 영화 철학이 우리에게 가장 가슴아프게 다가오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박하사탕이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지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호에겐 잘못을 고칠 시점이, 과거의 영호로 돌아갈 수 있던 시점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덧말. 윤도현밴드의 곡 '박하사탕'은 이 영화의 OST가 아니라 이 영화를 보고 감명받아 만들어졌다는군요.



posted by 박과장 2018. 5. 27. 12:5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국가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내용의 영화를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 연구자들도 그렇지만, 영화 감독들도 이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보통 둘 중 한가지 방법을 사용하는데요. 거대한 흐름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러한 흐름을 직접 만들어낸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다시 말해 거대담론의 형성과정을 보여주거나, 나머지 한 방법은 시대 앞의 개인의 여정을 마치 롱테이크 촬영을 하듯 잡아내서 그 의미를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로 확장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죠. 전자의 경우는 최근의 한국 영화 <1984>,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이 있겠고, 후자의 경우는 이 리뷰에서 다루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의 대표작인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이창동의 <박하사탕>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또한 후자의 이야기입니다.


런닝 타임이 4시간에 달하는 (3시간 57분) 긴 영화이기 때문에 줄거리를 요약적으로 서술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큰 줄기를 나누어보자면, 일단 시기는 대만 계엄령 시기이고(한국의 군부 독재 계엄령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 때의 방황하는 14살 소년인 샤오쓰와 학생이지만 조폭에 가까운 집단인 '소공원파', '217파'의 대립 속에서의 학생들의 이야기가 하나겠고, 나머지 하나는 계엄령이라는 시대 속에서 여러 풍파를 맞아가고 이겨내가는 샤오쓰의 가족 이야기 일 것입니다. 


사실 학생들이 조직적 폭력집단을 만든 것 조차도 시대와 무관하다 할 수 없습니다. 한국도 7-80년대의 군부 독재를 떠올려보면, '폭력의 일상화'라는 키워드가 등장합니다. 젊은이들의 주먹질 정도는 범죄가 아닌 삶의 일부로 인정하는 사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법보다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인 사회인 것이고, 이를 강화하는 것은 폭력을 전시하는 국가인 것이지요.


 

그러나 지식인 출신에다가, 대만 출신도 아니고 중국 본토(상해)에서 혁명을 피해 급하게 이주해온 샤오쓰의 아버지는 이런 사회와 불화 관계에 있습니다. 대만에선 이런 1940년대 이후 외부 출신을 외성인, 원래 그에 앞서서 이주했던 사람들을 본성인이라고 지칭한다더군요. 그에게는 자존심을 구겨가면서 옛 친구에게 승진을 구걸하는 것이나, 과거에 어울렸던 친구가 혁명 분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가짜 진술서를 써야하는 것이나,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국가의 가장이지만 가족들 앞에서 새벽녘에 뛰어나가 엉엉 우는 모습을 보이는 장면에서 그의 이런 시대와의 불화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합니다.


'밍'이라는 여자 주인공 캐릭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밍을 만나는 남자들은 모두 밍에게 반하게 되고, 영화감독은 첫눈에 캐스팅을 하려고 하지요. (참고로 유머 감각이 많지 않은 이 영화에서 영화감독이 성을 내며 '이래가지고 영화가 되겠냐, 이딴걸 왜 찍냐'고 말하는 부분은 감독이 자기 자신에게 건내는 농담같은 거의 유일한 장면입니다.) 밍을 차지하기 위해 두 파의 리더들은 한쪽이 목숨을 잃는 싸움을 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밍은 수동적 대상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을 두고 목숨을 걸고 싸우건 아니건 자신이 좋아하는 샤오쓰와 만남을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결말은 마음이 변한 것으로 보이는(이 부분이 영화에 100% 확실하게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샤오쓰의 친구 집에 있는 밍을 샤오쓰가 보게 되죠) 밍을 샤오쓰가 칼로 살해하는 것이지만요. 왜 샤오쓰는 밍을 죽였을까요? 그에 대해 한 마디로 단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질투 때문일 수도, 자신의 삶에 대한 혐오 일수도, 임계점을 넘으면 폭발하는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서일 수도, 폭력이 늘상 상존하는 시대 때문일 수도 있지요.


영화 내내 전구나 형광등이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두운 방에서 깜빡이는 전구 때문에 그 모습이 흐려지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샤오쓰의 학교에서 아버지가 분노를 폭발하는 장면에서는 아버지가 직접 형광등을 깨버리죠. 또한 소공원파가 217파를 습격하는 장면에서는 일부러 전기를 내려서 어둠 속에서 일을 처리하는데요, 이러한 조명 처리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지가 명백히 보이지 않습니다. 실은 그 존재가 중요한 것이지,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시대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한 고발이자 묘사같습니다.



연기에 대해서는, 일단 아역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러운 연기는 기대할 수 없겠습니다만, 장첸은 훗날 대배우가 될만한 좋은 재목임을 잘 보여줍니다. 대사처리에 대해선 제가 중국어에 조예가 없어서(아니 그런데, 어떤 언어에 대한 선입견이란건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래서 대사를 자연스럽게 하는지 안하는지를 외국어 영화에 대해 말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 싶어요)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미 배우이던 아버지와 형과 함께 출연해서 더 자연스러웠는지는 몰라도 나이에 맞지 않는 표정들을 보여줍니다.


'밍' 역할을 한 양정이의 경우는 이후로 그닥 하고싶지 않았는지 한편도 영화를 하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하네요. 



OST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Are you lonesome tonight?'은 영화 내용 상에도 등장하고, 이 영화의 영어제목인 'A Brighter Summer Day'를 가사로 갖고 있습니다. 두 소년 소녀의 여름날 장면 이 제목에 맞게 정말 아름답게 촬영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리뷰에서 늘 걸작으로 불리우고,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 다만 정말 보기가 어려운 영화였는데, 디지털 리마스터링 기념으로 2017년 11월에 개봉해준 덕분에 저도 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4시간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posted by 박과장 2018. 5. 24. 11:32

[주의 :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버닝>은 종수와 해미, 그리고 벤 세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소설을 쓰려고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고 있고, 해미는 카드빚에 쫒기면서 후암동 좁은 원룸과 나레이터 모델 현장 사이를 오가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으로 보이는 그 둘은 우연히 재회하고, 해미는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을 다녀오면서 해미는 의문 투성이의 남성인 ‘벤’과 함께 귀국하게 되죠. 그는 종수의 표현을 빌리면 ‘개츠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젊은 나이에 아주 많은 돈을 갖고 재미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셋은 술자리를 함께하기도 하고, 벤의 친구들의 모임에 같이 가기도 하고, 종수의 파주 시골집에서 함께 대마초를 나눠피기도 하고, 기묘한 조합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해미가 사라지고, 종수는 벤을 의심하며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버닝>의 외표는 서스펜스 스릴러이지만, 실은 이 영화는 제 관점에서는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신자유주의(벤)의 인간 파괴와, 이를 간파하더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과(종수) 혹은 간파하지 못해서 타버리게 되는(해미) 구조의 문제를 지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벤의 삶은 화려합니다. 그는 항상 종수에게 당신은 너무 진지하다고 충고하면서, 좀 더 가볍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극의 초반부터 해미의 입을 빌려 등장하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가 각각 벤과 종수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허기, 즉 본능과 재미만을 쫒는 리틀 헝거와 존재론적, 본질적 허기를 달래고자 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대립인 것이죠. 그러나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부시맨의 사회에서는 그레이트 헝거를 추구하고 높게 평가하더라도, 자본주의가 상륙한 이후에는 그레이트 헝거는 별 가치가 없어집니다. ‘글을 잘 써서’ 칭찬받은 문창과 졸업생인 종수의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가 실제로는 실형을 막지 못한다는 점이나, 대학을 나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택배를 비롯한 막일 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재미있는 점은, 벤은 이 사실-본인의 욕구 추구가 어쩌면 더 낮은 차원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수가 좋아하는 포크너의 소설을 사서 읽어보려고도 하고, 마지막 결말에서 종수의 일격 이후에 오히려 종수를 공격하기 보다는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한 자세를 취하죠. 벤이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힌트는 이외에도 더 많은데요, 예컨대 해미를 사라지게 만든 행위를 비닐하우스 태우는 일에 빗대어 말할때, 쓸모 없는 비닐 하우스가 참 많고, 없어져도 한국 경찰들은 관심도 없다고 말하죠. ‘그레이트 헝거’인 종수가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떻게 구분하는가’라고 질문하자, 그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동시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요. '나는 반포에도, 파주에도 있다'는 선언은, 스스로가 인격체라기 보단 상징임을 의미하죠.


<버닝>이 단순한 장르물이 아닌 자본주의와 인간성의 관계에 집착하는 점을 보여주는 몇가지 단서들을 모아보죠. 먼저, 벤을 추격하던 종수가 미술관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벤을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종수가 그 장면에서 바라보게 되는 미술관의 작품은 다름 아닌 용산 참사를 다룬 것으로 보입니다. 용산 참사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재산권 분쟁으로 경찰 진압과정에서 여러 명이 사망한 사건인데, 사망의 원인이 바로 화재였죠. 영화 제목은 <버닝>, 용산참사가 그려진 작품 바로 건너편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벤과 가족들. 이 정도면 매우 직접적인 상징이죠. 게다가 해미의 집은 참사가 일어난 바로 근처인 후암동인데, 후암동이라는 지명을 자꾸 화면에 노출시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종수와 해미의 고향으로 제시된 파주라는 공간입니다. 끊임없이 북한의 선전방송이 나오죠. 그러나 그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예컨대 종수와 해미가 과거에는 자본주의로부터 침략당하지 않아서 행복하게 지냈던 공간이지만, 이미 이제는 점령되었고(벤이 굳이 파주까지 올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이를 경고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북한에서는 끊임없이 방송이 나오지만, 실은 그쪽 조차도 제대로 된 해결방법은 아니며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습니다. 


이 외에도 예술가로서의 종수의 성장, 최승호 MBC사장이 분한 종수 아버지와 종수의 관계(최승호 사장이 이창동 감독의 경북고 후배라나요) 등 아직 리뷰에서도 풀어낼 떡밥이 아주 많지만, 이에 대해서는 2회차 관람 이후에 더 자세히 적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기에 대해서는 전종서의 연기에 대한 코멘트가 많던데, 대체로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많더군요. 그런데 저는 이게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봅니다. 일전에도 리뷰에 적었던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의 조금은 비현실적인 톤이 사랑의 비극을 더욱 강조해주듯이, 어쩐지 붕 떠있는듯한 전종서의 연기톤은 안정되지 못한 캐릭터의 내면을 더욱 강조해주는 효과를 지닙니다. 이창동은 테이크를 아주 많이가서 ‘변태 감독’이라는 말까지 듣는데, 이걸 통제에 실패했다고는 전혀 보이지 않아요. 



유아인은 본인을 확실한 주연급 배우로 자리잡게 해주는 역할을 드디어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굳이 이 글에선 그의 개인사를 둘러싼 논란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요, 지금껏 흥행에 성공한 주연작들은 많았지만 대부분 다른 강력한 주연배우들과 함께였고 그들의 연기가 더 빛났던 영화였습니다. 예컨대 <사도>는 송강호와 함께, <베테랑>은 황정민과 함께 주연을 맡았으니까요. 스티븐 연은, 한국어 연기임에도 불구하고(물론 교포 역할이지만) 자기가 해야할 것을 정확히 아는 배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색한 한국어가 웃길 수도 있는데, 서늘한 느낌을 주는게 비언어적인 통제가 잘 되어있는 프로페셔널로서의 강점이 잘 보이더군요.


서스펜스라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적 재미와, 넘치게 많은 상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영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청춘’을 다루었다는 이창동 감독의 언급은 약간 블랙 코미디로 느껴질 정도로, 이 영화에서 불타고 있는건 젊은이들 뿐만은 아닙니다. 감옥에 있는 종수의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종수의 어머니에게도 500만원의 빚을 받으러 찾아오는 검은 옷을 입은 존재가 있지요. 아마 어머니에겐 그 존재가 ‘벤’이 아닐까요.


<이 리뷰는 2회차 관람 이후 수정할 예정입니다.>


posted by 박과장 2015. 5. 19. 14:00

 아주 답답합니다. <트라이브>를 보기 시작한 후 처음 10분 정도의 심리 상태입니다. 왜냐구요? 이 영화는 청각장애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모든 의사소통이 수화로 이루어지는데,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자막 한 줄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영화 맨 처음 앞으로 자막이 없을 것이라는 자막은 나옵니다만.) 게다가 일반적인 잡음을 제외하곤 영화 음악도 없어요. 하지만 10분 여를 견뎌내면, 화면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얼개를 이해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 특별한 영화적 '체험'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에게 영화속 대사는 엄청난-혹은 엄청나다고 믿어온-것이었습니다. '드루와' 가 없는 <신세계>,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 아니, 이게 아니고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는 대사가 없는 <부당거래>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영화의 주제의식을 한번에 정리해주기도 하고, 관객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하는 것이 대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사가 없이(정확히는 수화가 오고가지만, 그것도 우크라이나 수화이니 우리나라 관객들에겐 없다고 보는게 맞지요.) 관객들은 대부분 같은 이야기를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물론 약간의 해석 차이는 있지만, 그건 대사가 있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렇다면 영화에서 대사는 정말로 엄청난 것일까요?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에서 소리나는 말이라는 것이 그렇데 대단한 것일까요?  <트라이브>는 단순한 영화적 경험을 넘어 이러한 성찰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화 스스로의 스토리를 배제하고라도 말이에요. 순전히 이러한 양식만으로 볼 가치가 충분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고, 청각 장애가 있는 학생들만 다니는 기숙 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학교는 사실 마피아 조직이나 다름없습니다. 학교 선생들부터 가장 어린 학생까지 앵벌이, 매춘, 강도, 절도 등 온갖 범죄를 조직적으로 운용하고 있어요. 이 조직에서 꽤 상층부에 편입되어 신임을 쌓아가던 주인공은 매춘부로도 일하는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고, 일을 방해하다 집단 내에서 말단 앵벌이의 위치로 추락합니다. 결국 사랑을 좌절당한 분노로 몇 명의 상층부를 모두 살해하고는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상당히 흔한 이야기입니다. 누아르 장르의 꽤 익숙한 이야기죠. 잘 나가던 조직원이 사랑때문에 조직에 배신 혹은 해를 끼치고, 제거되거나,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조직에 맞서서 싸우게 된다는 이야기는 한국 누아르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만큼(<달콤한 인생>, <차이나타운> 같은 영화들요) 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트라이브> 가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점이라면 그 배경이 엄연한 '학교' 이고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이것이 실제로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형식적 특징 말고도 사회고발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양식적 특징을 넘어 영화라는 장치로서의 특징을 몇가지 살펴보죠. 감독은 영화의 특성상 모든 배우가 비전문, 그것도 실제로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들을 캐스팅했습니다. 총 1년의 시간동안 SNS를 통해 캐스팅을 작업했다고 하네요. 사실 엄청난 성공이라고 봅니다. 어떤 전문 배우도 이런 연기는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 하나의 감각이 좌절되어 있는 묘한 광기를 대단하게 표현합니다.


 편집과 카메라 움직임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원래 대사에 흐름에 맞춰 카메라가 움직이는게 일반적인 촬영의 기법이라면, 이들은 사실상 '온몸으로' 말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풀샷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또한 원래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관조적인 시선으로 느껴져서 사회비판적 분위기를 더욱 강화시켜 줍니다.




한줄평 : 우리가 지금까지 들었던 말소리들은 다 뭐란 말입니까?

posted by 박과장 2015. 5. 19. 09:34

저는 야구를 좋아합니다. 1, 2, 3루의 역경을 거치고 다시 홈으로 금의환향하는 신화적인 구성도 좋고, 공 하나 하나마다 경우의 수가 달라지는 확률의 맛, “타임 아웃이 없는” 승부의 맛,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지만 결과는 모두 다른 인생의 맛도 좋습니다. 반면, 저는 한국의 엘리트 체육 시스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한 번 경쟁에서 미끄러지면 이를 되돌릴 길이 요원해집니다. ‘운동만’ 하도록 평생 요구받아온 그들은 운동이라는 끈을 놓쳤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미국 메이져리그의 선수들이 은퇴 이후 전공을 살려 다양한 진로를 찾아나가는 것과 아주 대비됩니다. 



 영화 ‘파울볼’은 이 두가지 모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엘리트 체육의 경쟁구도 속에서 미끄러진 야구 선수들을 재기하고자 창단된 야구 구단 ‘고양 원더스’와 그 감독 ‘김성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벤쳐 재벌이 되었지만 야구에 대한 사랑이 여전해서 수익은 커녕 오히려 돈을 계속 투자해야하는 독립 구단, 그것도 선수가 잘하게 되면 프로로 스카웃 보내고 그것을 목표로 삼는 구단을 만드는 허민 대표와, 수많은 프로 구단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이러한 구단의 감독으로 부임하는 김성근 감독 모두 실리, 상식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일종의 성스러움을 부여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대단함을 느끼는 순간은 의외로 단순해서, ‘나같으면 못하겠다’ 싶은 결정들을 보면 경외감을 느끼곤 하죠.



 영화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감독 김성근과 고양 원더스의 선수들입니다.

 김성근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이야기들과 책들이 시중에 나와 있지만,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의 리더십은 전형적인 일본의 ‘아버지’ 그 자체입니다. 아주 혹독한, 모두가 나가 떨어질 만큼의 지독한 훈련을 시키고 선수들을 괴롭(?)히지만 선수들에 대한 강한 책임 의식, 이 배가 침몰하더라도 배에 마지막까지 타고 있겠다는 선장의 마음같은 것이 김성근의 리더십입니다. 워낙 사회에 어른의 모습이 없다는 이야기가 팽배하다보니(사실 이는 세대 갈등이 주요 원인입니다만) 이 리더십의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사람들이 따지고 들기 보단 그저 좋은 쪽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게다가 결과가 좋으니 (고양 원더스는 꽤 많은 프로 선수를 배출해냈고, 그 이전에 맡았던 SK는 3번의 우승, 1번의 준우승을 이루어 냈으며, 현재 만년 꼴지이던 한화를 중위권에 안착시켰습니다) 별 반론이 나오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하지만 분명 독재적이긴 하죠.



 고양 원더스의 선수들은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경쟁에서 도태되었던 이들이기에 다양한 직업출신이기도 하고,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야구 소년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는 하나, 프로 진출뿐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이 별다른 대본이나 연출 없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드라마가 됩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는 뽀얀 국물의 설렁탕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심장을 뒤흔드는 이야기나 소름끼치는 반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실이라는 형태가 주는 먹먹함, 제대로 끓인 설렁탕의 묵직함 처럼 가슴을 채워오는 그 뭔가를 기대하지요. <파울볼>을 그 점에서 썩 훌륭한 이야기 소재를 썩 훌륭햔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담아낸 설렁탕 한 그릇 같은 영화입니다. 지금은 프로가 된 원더스 출신 선수들이 앞으로 해나갈 플레이와, 한화의 감독이 된 김성근의 발걸음 역시 이 영화의 관객들이 함께 계속해서 즐겨나갈 현재 진행형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줄평: 절박한 이야기의 힘.

posted by 박과장 2014. 8. 8. 00:33


 일전에 정성일 평론가 인터뷰에서 본 이야기인데, 정성일씨가 차이밍량 감독을 만나서 물었답니다. "좋은 영화란 어떤 영화입니까?" 그러자 차이밍량 감독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네요. "영화 만드는 사람의 내일을 걱정하면 좋은 영화이고, 온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면 나쁜 영화입니다."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이 이야기는 책임감에 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던지 내가 받아들이고 책임질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야한다는 거지요. 전혀 알지 못하는 것,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이치에 맞게, 허술하지 않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와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 이런 일들이 이야기 만드는 일의 기본적인 책임이며 의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지점에서, "명량"은, '3부작의 일부가 아니라 한편의 영화로서' 볼때는 절대 좋은 영화가 아닙니다. 명량은 많은 인물들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갑자기 스크린에 나타난 진구는 종횡무진 뛰어다니다가 이순신 장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아까워하지 않으며 그의 부인으로 나온 이정현도 왜 말을 못하게 되었는지 선천적인 건지 후천적인건지, 진구는 어떻게 만났는지, 왜 진구를 저렇게 사랑하는지 아무 것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물론 고작해야 두시간 남짓의 시간만 주어지는 상업영화에서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지만, 그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도 상황을 납득시키는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는 것이 영화 만드는 이의 기본 소양이자 의무이자 능력입니다. 이걸 못하면 제대로 된 이야기꾼이 아닌겁니다. 


 하다못해 주인공인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조차 변변치 못합니다. 이순신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외국인이 이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시 조정과 이순신의 관계에 대해 아주 단편적인 모습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정치에 의해 이순신은 고초를 겪었는데 이야기에 정치라고는 1그램도 없습니다. 그냥 "왜군은 나쁜놈인데 조선의 조정은 방해가 되고 그러니까 조정 대신들도 나쁜놈들이고 이순신은 착하고 그래서 나쁜놈들이 안도와주지만 나쁜놈들을 무찌른다." 이 이야기에서 한발짝도 진전된 것이 없습니다. 이런 얘기는 일곱살짜리도 하겠습니다.

 

 아니 그냥 이 영화는 주제의식과 전투씬에 변태처럼 몰두한 나머지 나머지 부분은 그냥 도구로 이용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지 못합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왜군 소속이지만 사실은 첩자로 나오는 오타니 료헤이는 어째서 조선군의 편인지 힌트조차 주지 않습니다. 그냥 나와서 왜군이다가 조선군이다가 왔다 갔다 하며 쌍검만 휘두릅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 안에는 사람이 없어요. 그냥 도구로 인물을 만들어 막 가져다 쓸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김한민 감독을 마이클 베이와 비유하여 이야기하더군요. 초기작인 '더 록', '아일랜드' 등에서 괜찮은 블록버스터를 만들던 마이클 베이가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손을 대며 미취학아동 수준의 영화만 찍어내게 된 것처럼, '극락도 살인사건'으로 훌륭한 상업영화 데뷔를 했던 김한민 감독이 '명량'이후 계속 그저그런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찍어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트랜스포머에는 최소한의 예절이란게 있습니다. 적어도 그 영화는 로봇에 대한 애정은 있어요. 확실한 세계관이 있고, 로봇들이 굳이 지구에서 변신까지 해가면서 싸워야할 이유를 줍니다. '명량'엔 그게 없습니다.


 영화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김한민의 전작 '최종병기 활'은 저에겐 분명히 표절 영화였고(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겁니다), '명량'은 올해 본 영화중에 최악의 영화중 하나였습니다. 이미 기대치가 별로 없는데다가 그마저도 없어졌어요. 어떻게 '극락도 살인사건'을 만들었는지 의아할 지경입니다. 이런 연출과 표절 아래에선 최민식의 연기에 대해 논하는 것 조차 무의미합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훌륭한 배우입니다만,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끌려다니는 모습이 좀 안타깝긴 했습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서 바라는 것은 모두 다를겁니다. 열대야로 지쳤는데 스크린에서 시원한 바다를 보며 피서를 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고, 왜군에 맞서서 인간이 아닌 반신(半神)의 모습으로 온갖 역경을 말도 안되게 이겨나가는 이순신을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겁니다. 다만 전 최소한의 영화라는 형식에 대한 예의와 미학적 완성도를 필요로 합니다. 천만관객이 되거나 말거나 상업적 부분은 당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큰 관심은 없지만, 적어도 천만을 돌파했을때 제가 한 자리를 보태줬다는 사실이 꽤 고통스럽긴 할 거 같네요.



 엔간해야지 봐주죠. 3부작 다 내면서 얼마나 대단한 설명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편의 영화를 돈내고 보러 온 관객들에게 이러면 안됩니다.


한줄평 : 이것은 좋은 영화가 아니다.


posted by 박과장 2012. 5. 9. 01:40

 

(상영작이라서 붙이는 안내 - 나름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대부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볼 예정이신 분은 스킵하시는 편이 재미질겁니다.)

 

 욕망은 우리를 움직이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다만 충족되면 그것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욕망이 정점에 이르는 순간은 그것을 이룰 수 없을때입니다.

 '은교'는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박해일이 연기한 대시인 '적요'는 젊음, 그리고 이로 인해 얻을 수 있을 싱그러운 은교를 욕망하고 김무열이 연기한 젊은 작가 '지우'는 적요의 재능을 욕망하며 '은교'는 아버지를 욕망합니다. 친아버지가 아니고, 아버지라는 것의 존재를. 이건 영화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의야하실 분도 있는데, 곧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하간 이 세가지 종류의 욕망 다 이루어 질 수 없지요.

 적요는 교과서에 시가 실린데다가 자기 이름의 문학관까지 지어질 대시인입니다. 국민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데다가 어느 자리에 나가도 사람들은 알아서 설설 깁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 양반인데 아무래도 예술을 하다보니 좀 괴팍한 데가 있어요. 심하진 않지만.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제자가 젊은 작가 '지우'입니다만, 사실 이 사람은 작가로서의 재능이 전혀 없습니다. 좀 치사하달 정도로 영화는 그 점을 부각시킵니다. 은교의 거울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은 너무하다싶을 정도로 - 아니 자칭 글 쓰는 사람이란 놈이 그런 감성을 이해 못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걸 이해 못한다고 말한다니요, 말이나 됩니까 - 드러나지요. 베스트셀러인 소설 '심장'을 히트시킨 상태인데, 알고보니 이것도 스승인 적요가 대필해준 거죠. 지우는 언제 진실이 드러날 지 몰라 한편으로는 겁이 나기에 더욱 더 열심히 적요를 모십니다.

 그러니까 지우를 움직이는 두가지 동력은 첫번째는 자신이 가짜 작가임이 드러날까 하는 불안감이고, 두번째는 혹시 적요의 곁에서 지내면 그 재능이 어느 정도 옮아오지 않을까 하는 욕망입니다. 불안감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하자면, 우리가 가지는 대부분의 추악한 부분이 그렇듯이 지우는 이걸 포장하기 위해 적요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아버지같은 분, 사랑하는 선생님 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가 술을 먹고 이야기 할때마다 이게 꽤 많은 부분이 포장인게 드러나죠.

 재능에 대해서는...공대생이라서 한계가 있다는 강요를 영화는 내내 이야기 하지만 그건 사실 전공의 문제가 아닐겁니다. 대한민국에서 자기 재능에 맞게 문/이과가 꼭 나눠지진 않으니까요. 그보다는 애초에 문학 타입의 사람이 아닌거죠. 예술이란게 원래 그렇듯이 시간과 노력만으로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없기에 지우의 욕망은 더욱 이루어질 수 없는거겠죠. 그는 본인을 이적요 껍데기라고 표현할 만큼 적요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적요와 닮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 합니다. 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대표하는 캐릭터지요. 안타깝게 지우의 가족관계에 대한 묘사가 없어서 직접적으로 추측할 수 없지만.

 한편 적요는 이런 와중에 여고생 은교를 만나게 됩니다. 일흔이 넘은 남자이지만 시인이라 감수성도 예민하고, 꾸준히 젊은 시절의 자신을 욕망하지만 이걸 억지로 부정하죠. 이걸 잘 나타내 주는 상징이 젊은날의 본인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입니다. 그 욕망을 부정하기 위해 책상위에 있던 사진을 엎어놓고 보질 않는데, 한창 은교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불타오르게 되면서 다시 세워놓게 되죠. 젊은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처럼. 

 욕망에 대한 가장 강렬한 표현은 무의식에서 나오는데(우리는 의식 세계에서는 생각보다 꽤 많은 억압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습니다) 꿈은 그 무의식이 현실적 제약을 넘어 가장 크게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가 얼마나 젊음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가 바로 꿈에서 나타나죠. 바로 은교가 헤나를 해주고 있을때 깜빡 잠에 드는 장면입니다. 은교를 쫒아 가기 전에, 그에 앞서서 적요가 더 신경 쓰고 감격한 부분은 유리창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입니다. 다시 젊어져 있는, 그 얼굴. 그러나 이 역시 이루어질 수 없기에 아주 아픈 욕망이죠. 젊음은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그의 욕망의 다른 한편은 은교에 대한 욕망입니다. 이건 사실 젊음에 대한 갈구와 크게 다르진 않은데, 지우가 극의 후반부에서 대놓고 이야기 하듯 그의 은교에 대한 사랑은 더러운 스캔들로 세간에선 받아들여지기에 은교에 대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그가 젊음을 꿈꾸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은교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 앞서, 흔히 영화 '은교'가 받고 있는 오해가 이게 남성들의 판타지에 대한 영화라는 겁니다. 나이든 노인에게 어느날 갑자기 젊고 예쁜데다가 싹싹하고 얘기도 잘 들어주는 여자가 나온다니, 어떤 젊은 여자아이가 미쳤다고 그럴까. 이건 그냥 더러운 늙은 노인의 판타지가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사실 은교가 가지고 있는 욕망의 근원은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변형입니다. 그걸 이야기 하면 이 남성 판타지가 부정될 수 밖에 없지요.

 영화 내내 은교가 유일하게 이야기하는 가족 구성원은 '엄마'입니다. 은교를 때린 것도 엄마. 은교가 슬퍼하는 것도 엄마. 왜 온갖 이야기를 다 하면서 아버지의 얘기는 없을까요. 전 영화를 보다 아마도 은교는 어떤 사정에 의해, 그것이 사별이든 이별이든, 아버지가 없을거라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됐습니다. 즉 은교는 나이든 남성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극복이 유년기에 없었습니다.

 모든 여자 아이들은 어린 시절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겪는다고 합니다. 이건 아버지가 주는 애정에 있어서 아버지가 최초의 이성이기에 아버지의 애정을 어머니와 다투게 되는 건데, 이 다투는 과정 이후 성장하면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당연하고 유일한 이성 관계임을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레 아버지를 이성의 대상으로 놓지 않게 되고, 그 이후 다른 나이든 남성도 자연스레 '아버지'처럼 대할 수 있게 되는거죠.

 헌데 이 과정이 은교에겐 없었고, 그래서 아버지뻘, 혹은 그 이상 되는 남성과의 관계가 '왜 이성적 관계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한 무의식적 확립이 존재하지 아니했던 겁니다. 실제로 정신과에 '나이든 남성에게만 자꾸 끌리고 연애감정이 생긴다는 경우 이런식으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없었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도 있죠. 그러니 은교가 적요를 대할때의 기분은 아버지와의 관계와 연인과의 관계 그 두가지가 혼동되어 있었던 거죠. 적요를 놓고 지우와 갈등관계에 자꾸 휩싸이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정리하자면, 오히려 적요는 은교의 판타지에 부합하는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는 나이도 들었고, 아주 자상한데다가 경험도 많고 박식하고, 이루어놓은 것도 많죠.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앓고있는 은교에게는 더 없이 끌리는 상대자로 보였을거에요.

 그리고 은교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처럼 '뮤즈'가 아닙니다. 이건 영화 홍보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여하간 적요가 은교를 보고 좋은 작품을 탄생시킨 건 맞지만 그 전에도 '심장'으로 지우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걸 보면 이 사람은 그냥 타고난 천재입니다. 언제건 좋은 작품을 써낼 능력도 있구요. 적요가 작품을 써내기 위해 은교를 만난게 아니고 은교를 만나다보니 은교의 에너지가 그의 재능과 만나서 좋은 작품이 나온거죠.

 자, 그러면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 왜 은교는 적요의 이마에 키스하고 지우에게로 가서 섹스했느냐. 은교는 그때까지 그 소설을 지우가 쓴 줄 알아서, 본인을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해준것에 감동 받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어느 순간 극복되면서 여자 아이는 이제 다른 이성을 찾게 되는거죠. 적요의 존재는 그녀에게 아버지처럼 단단해졌고 이제 극복의 단계가 시작 된겁니다. 한번의 망설임이 나오는 걸 전 그 발전의 전환점으로 봅니다. 이제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었고 새로운 이성에게 아내가 되어야 하는 거죠. 막상 적요와 섹스를 하자니 그는 늙은데다가, 알고보니 점점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오는거죠.

 헌데 조금 불쾌하게까지 느껴졌던 점은 이러한 상징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좀 더 은근한 맛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았나요. 영화 내내 은교의 아름다움을 은근하게 표현했듯이. 조명담당이 엄청 고생했을 영화입니다. 빛을 통해 은교의 아름다움을 기가막히게 살려냈거든요.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요. 박해일은 잘했는데, 그건 30대 배우 박해일이 연기를 잘한거구요. 왜 하필 그에게 분장을 시켜서 70대 노인연기를 시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젊은날의 그의 모습이 나오는 그 몇 컷을 위해서? 젊음에 대한 갈구는 젊은 사람에게서 그렇게 쉽게 나오는게 아닙니다. 이건 감독의 무리수죠. 투자 유치를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분장하느라 고생했을 해일씨에게 박수.

 김고은은 신인답게 연기가 불안정한 장면이 좀 있었지만, 한예종 출신이라 기본기가 뛰어나다는 인상도 많이 받고, 딕션도 좋고. 역시 몇몇 장면에서 호흡과 발성이 좀 떠 있는게 걸리긴했지만 은교 캐릭터 자체가 튀는 느낌을 줘야 되서 크게 무리수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출 연기하느라 고생했어요. 몸이 예쁘던데.

 가장 안정되고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고 생각되는 배우가 김무열입니다. 단순한데 안그럴려고 노력하는 캐릭터가 연기하기 은근히 힘들거든요. 그 세밀한 허세를 스스로 참아내고 연기해야되니까.

정지우감독의 연출은 옛날에는 참 신선한 것이었는데 벌써 영화 해피엔드가 곧 15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노장감독을 보는 느낌이 났습니다. 몇몇 장면의 연출은 너무 진부하게 느껴졌구요. 소설을 읽은 분들은 오글거리는 장면이 소설에서 더 많았었다는데, 신선한 영화를 만들라면 '헐'에피소드 같은건 좀 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70대 노인과 10대 소녀는 굳이 그런 유치한 예 말고도 차이가 많거든요.

노출 논란같은게 별로 의미있어 보이는 영화는 아닙니다. 벗는다고 야한게 아니거든요.

 

한줄평 : 원래 사람은 꼭 못 얻을걸 얻고싶어 하지요.

★★

 

 

 

 

 

posted by 박과장 2012. 5. 6. 02:09

 


 2000년대 이후 제작비가 100억원 이상 들어간 영화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태풍, 괴물, 디 워 이상 다섯 편이라고 합니다. 백억이라는 돈이 감이 오십니까? 살면서 한번에 가장 많은 돈을 쓴게 기껏해야 비행기표 정도인 저는 잘 감이 안옵니다만. 어찌됐건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든다는건 꽤 많은 사람의 미래와 생각을 짊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큰 영화를 만드는 일을 감독들은 꼭 축복이라고마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의 초기작들 처럼 직접 투자하거나 아는 사람들정도 선에서 책임이 멈추고 리스크가 적으면 참 다행이지만 큰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투자를 받게 되죠. 여러 사람의 밥줄이 걸린 문제가 됩니다.


 처음 '괴물'의 제작소식을 들었을때 들었던 느낌은 당황에 가까웠습니다. 이미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을 통해 제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순위권에 들어있었고, '이야기'에 탐닉하고 디테일의 미치는 그의 특성 상 블록버스터 영화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아무튼 제작소식을 들은 날 부터 영화 '괴물'에 관한 어떤 사전정보도 얻지 않게 노력했습니다. 미리 알고가면 김샐것 같아서.


 그리고 개봉하자마자 영화관으로 뛰어갔습니다. 너무 궁금해서지요. 세상에 봉준호가 괴물이 나오는 블록버스터를 찍는다니. 저 사람 디테일 좋아하는데 CG에 만족 못해서 결국 탈쓰고 한건 아닐까. 시작하자마자 괴물이 나오는데 송강호가 이단옆차기를 날리면서, '여기가 스케일의 왕국이냐'라고 일갈하진 않을까. 혹은 주인공들이 생각보다 엄청 쬐끄만 괴물을 키워주는 영화는 아닐까? 생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더군요. 괴물은 스케일 큰 영화이면서 이와 동시에 '안티 블록버스터' 영화입니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해서 100억을 넘게 쓴 영화가 안티블록버스터일수가 있을까. 정확히 얘기하면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기존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장르적 관습에 이단옆차기를 날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왜 그런지 풀어보지요.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주한 미군 엉아들은 버리면 안되는 포름알데히드 같이 위험한 화학물질을 처리하기 귀찮아서 그냥 한강에 풀어버립니다. 여기에 노출된 탓인지 물고기 종류의 변종으로 보이는 '괴물'은 한강에서 요상한 형태로 무럭무럭 자라나게 됩니다. 키워드 첫번째. 왜 미군이 '괴물'현상의 원인일까요? 여러분이 알고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속에서 미군은 어떤 모습입니까. 대체적으로 걔들은 정의의 편에 서 있고, 때론 주인공의 소속이기도 하고, 마지막에 사건을 잘 정리해주기도 하고 그런 애들인데, 미군이 오히려 악몽같은 현상의 원인이랍니다. 딴지 걸고 시작하지요.

  

 그리고 나타난 우리의 주인공 송강호는 톰크루즈나 브래드피트가 절대 아니죠. 외모도 평균 이하인데다가, 뭐 잘하는게 있기는 합니까. 돈을 잘 벌기를 합니까. 중학생인 딸내미한테 맨날 쿠사리나 먹는 마음만 착한 아버지입니다. 키워드 둘. 주인공은 선망의 대상이 아니어라. 그 조력자인 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국의 민주화에 몸바쳤으나' 현실은 백수인 박해일, '실력은 있으나 새가슴이라' 맨날 금메달 하나 못따는 양궁선수 배두나. 다들 프로페셔널 하다기에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들 빠진 인물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상대하는 괴물은 국민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할 만큼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딸이자 조카이자 손녀인 고아성이 납치된 상황 때문에 이 나사빠진 사람들이 괴물하고 싸워야 되는 거죠. 하지만 괴물을 때려잡는 과정을 통해 모두들 성장하는 모습이 또 재미있습니다. 박해일은 유일한 재주이던 도주와 화염병 투척을 통해 괴물을 때려잡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배두나는 인생에서 가장 떨릴 화살 한방을 성공시키면서 본인의 단점이였던 나약한 멘탈을 극복하지요. 게다가 송강호는 점점 철이 들구요. 그런면에서 이 영화는 성장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반미영화다라는 소문이 돌았었습니다만, 그냥 이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장르가 얼마나 따져보면 웃긴지 엿맥이고 싶었던 걸로 보입니다. 특히 강하게 변명하는 듯한 장면이 있죠. 처음 나타난 괴물에게 송강호가 한방 먹이려고 무거운 돌을 들때, 같이 돌을 들어주는 사람은 암만 봐도 미군 병사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괴물에서 굳이 '비판'씩이나 하는 부분을 찾는다면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시스템으로 사람을 지배하려는 상황 자체겠지요. 이런 비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역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누명을 씌워서 송강호를 잡아 가둬놓았을때, 송강호가 탈출하려는 장면에서 제일 잘 드러납니다. "노 바이러스? 바이러스 없다는거네?" 이 대사 한마디에, 그간 여러가지 정보를 차단하므로서 개인들을 암암리에 억압해 왔던 시스템의 존재가 코믹하지만 살벌하게 드러나는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봉준호 감독이 왜 봉테일인지 섬뜩하게 보이는 영화입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 가볍다고 시치미도 많이 떼지요. 언제들어도 대단한 변희봉의 명대사. "저쪽 테이블에서~ 오징어 다리가~" 하는, 그런 장면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고아성의 빈소 앞에서 가족들이 다같이 오열하는 장면입니다만.


 주인공이 많은 영화인데다가 배우들이 다들 베테랑이라 정확히 자신의 몫을 연기합니다. 봉준호는 작정하고 송강호의 송강호스러움을 끌어냈으니, 이건 그냥 송강호로서 훌륭한 연기이고, 의외로 재미있었던건 변희봉의 연기지요. 엄숙함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 볼 수 없는 나이든 남자의 연기는 의외로 삶의 질곡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 웃기는 대사를 해도 슬픈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또 이 영화로 데뷔를 한 고아성의 연기도 재미있습니다. 역시 이런 역할은 경험이 없어야 됩니다. 봉준호감독은 통제가 좀 힘들더라도 신인연기자를 쓰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그랬고.

 위기가 오면 가족은 뭉치나 봅니다. 고아성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배두나가 나중에 금메달을 땄는지 안땄는지 가지고 당시에 말이 많았었지만 사실 영화라는게 그게 중요한건 아니죠. 




덧붙임 하나. 괴물 목소리는 오달수가 녹음했다더군요. 흐하하...

덧붙임 둘. 속편 계획은 엎어졌나봅니다. 강풀 작가가 시나리오를 쓴다그랬던 것 같은데.


한줄평 : 그런데 누구한테나 괴물을 있습니다.


★★★★

 

posted by 박과장 2012. 5. 3. 01:19

 

 감정의 유통기한은 어디까지인가요.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은 누구나 주목합니다. 아름답고, 빛나고, 설레는 그런 날들이니까요. 모든걸 집중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언제 우리는 사람을 잊고 언제 우리는 만나지 못해도 괜찮아지나요.

 제목부터 봄날이 가버렸다니 좀 슬픕니다. 사실 우리는 봄날이라는 단어를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이야기할때 사용합니다. '왕년'같은 개념이죠. 글을 쓰는 오월 초에 날씨가 너무 더워서 봄날이 가버린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런 용법은 아닐거에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녹음실에 다니는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는 지방을 다니면서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강릉에 있는 방송국 PD인 은수(이영애)와 함께. 같이 여행을 하게 되는 일이라서인지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한편 상우의 아버지는 일찍 상처했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진즉 작은마누라를 얻어서 나간 남편을 잊지 못해 매일 매일 기차역으로 옷을 정갈하게 챙겨입고 나갑니다.

 한창 아름다운 사랑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장가가라는 가족의 압박도 있고 해서 상우는 은수에게 아버지에게 인사를 가자고 이야기하는데,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이게 엄청나게 부담스럽습니다. 말을 돌리고, 말을 돌리다보니 마음이 상하고, 닫히게 되고, 한 달만 떨어져있자고 상우에게 이야기 하게 되죠. 그 와중에 자연스레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결국 상우에게 이별을 통보하게 됩니다.

이후 상우는 좀 망가집니다. 술에 잔뜩 취해 찾아가기도 하고, 은수가 새로 뽑은 차를 긁어놓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죠. 다니던 녹음실을 때려치려고 하기도 하고.

그렇게 서로 안보게 된 두사람, 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어느날 은수가 자신의 삶에 상우가 꽤 큰 의미였는지 알게 됬거든요.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하는 그녀 앞에 서 있는 상우는 사실 그 때의 상우가 아닙니다. 충분히 상처받았고 그녀에게 정이 떨어졌으니까. 다시 시작해보려고 하는 은수를 잘 떨쳐냅니다.

 "봄날은 간다"는 관계의 시작보다 그 끝에 초점이 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한거죠.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은수와 상우가 극의 절정부에서 이별을 맞이하게 되니까요.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도 둘의 이별장면입니다.

- 헤어지자.

- 내가 잘할게.

- 헤어져.

- 너 나 사랑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상우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사실은 변하지만(마지막에 은수를 다시 잡진 않잖아요) 그의 세계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매일 곱게 차려입고 기차역으로 나가는 상우의 할머니나 이른 나이에 상처했지만 재혼하지 않는 그의 아버지를 보세요. 이건 상우가 환경적으로 학습한 것이기도 하고, 아버지를 닮아 조용한 그의 성품에도 잘 걸맞는 것이죠.

 그러나 은수의 세계는 그러지 않습니다. 은수는 일단 이성에게 다가가는데 큰 장벽이 없는 사람입니다. 상우를 처음만났을때 척하고 손을 내미는 모습이 그렇죠. 새로운 것에 매력을 잘 느낀다는 것은 좋아하던 것을 잘 바꾼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게다가 한번의 이혼을 통해 남녀 관게에 대한 냉소적인 생각도 묻어납니다. 사실 결혼이라는 과정까지 가는데에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을텐데 그게 무너졌으니 냉소적일 수 밖에요.

 허진호 감독은 이 둘의 감정선을 아주 내밀하게 그려냄으로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멋대로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행복'을 사랑 삼부작이라고 묶어서 부르곤 하는데, 이 세 편 모두 현실적인 상황들이 만들어내는 마음의 장벽과 뜨거운 사랑이 부딪힐 때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봄날은 간다는 극적인 장치를 가장 배제함으로서 너무나 현실적이라 가슴 아픈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이야기를 해볼까요. 원래 이영애는 현실적인 영화랑 잘 안맞는 배우중에 하나입니다. 너무 예쁜 비주얼이 그렇고, 사람들이 잘 못느끼지만 발성이 굉장히 특이한 배우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주변에 목소리가 이영애같은 사람은 정말 드물어요.

 그 목소리가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는 참 좋은데 이렇게  현실적이 영화에 어울리는가 하는 걱정은 좀 됩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허진호 감독은 굉장히 짧은 대사길이를 주었고, 이 작전은 잘 먹혀들어갔습니다. 영화 내내 이영애가 길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별로 없어요. 게다가 외모가 주는 느낌이 은수와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구요.

 제가 유지태라는 배우가 참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기 시작한게 바로 봄날은 간다입니다. 아직 소년같은 얼굴이 있던 그때의 유지태에게 이 배역은 몸에 잘 맞는 옷입니다. 느릿하지만 처절한 연기. 사랑이 분노로 뒤바뀌어 버린 상황을 어쩔줄 몰라하며 노래책을 들여다보며 '미워도 다시 한번'을 불러제끼는 장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의 얼굴들 중 하나입니다.

 조연들은 크게 비중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상우 아버지역할의 김인환씨는 아내 없이 아들을 키워온 가장이자 엄마역할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모습을 슬프지만 굳건하게 보여줍니다. 인상적인 연기에요.

 

언젠가 봄날은 오고, 때로는 가기도 합니다만, 마지막 재회의 장면에서 두 사람이 걷는 길이 벚꽃이 만개한 눈부신 장면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아이러니이자 아름다움일겁니다. 어떤 이별은 가장 아름다울때 오기도 하거든요. 그래도 전 사랑을 믿고 한번 더 슬픔을 각오하려 합니다만.

 

한줄평 : 때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일이 사랑의 종말이 되곤 합니다.

 

 

 

 

posted by 박과장 2012. 5. 1. 00:11

  

 <건축학개론>의 리뷰를 통해 이미 이 블로그에서는 성숙하지 못하지만 착한 남자가 어떻게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 상처받았다고 믿게 되는지 이야기 했었습니다. 넵. 남자가 나쁜겁니다.

 오늘 이야기 할 영화는 건축학 개론의 이제훈보다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역이지만 사실 하는 짓은 크게 다르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500일의 썸머. 여자주인공의 이름이 '썸머'인지라 500일의 그 여자의 기억 혹은 500일의 여름날 요렇게 중의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군요.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하는 일을 기억하는건 계절에 대한 기억처럼 선명하지만 왜곡된 이미지를 같게 되니까요.

 우리의 주인공 톰(조셉 고든 레빗)은 우리가 어디서 많이 본 스타일입니다. 적당한 자기애와 자기비하가 있으면서 팝 컬쳐보다는 좀 된 노래를 좋아하고, 겉치레보다는 실속있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사실 화려한 것에 대한 동경도 좀 있구요. 여자 좋아하고. 주변 친구들은 좀 더 심각한 케이스죠. 마지막 연애가 초등학교때라거나. (근데 옷은 못입는 듯 너무 잘입어서 좀 언밸런스 하긴 합니다. 이런 형들 TPO에 맞게 옷입는거 본적 없는데..)

  헌데 이 남자, 귀여운 구석이 있는게 아직도 진짜 사랑을 믿는답니다. 사실 요새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멋있는 사랑의 기준은 쿨함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데 얼마나 시대착오적 생각입니까. 게다가 백마왕자에 대한 환상 비슷한 것이 있어서 언젠가 본인에게 꼭 맞는 사람이 자기 손을 잡아줄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 '썸머'는 자신이 예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예쁜 여자입니다. 이런 경우 자의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커지는데, 말하자면 스스로를 많이 사랑하게 되는데 그 대부분의 이유가 외모에 있는거죠. 그러다보니 공허한 내면을 채우기 위해 맘에 들지도 않는 책을 읽는다거나 음악을 좋아한다고 우기는 '교양 속물'이 됩니다. 영어로는 힙스터라고 하던데.

 톰은 직장동료인 썸머를 만나서 호감을 느끼죠. 이쁜 여자니까. 게다가 썸머는 자신이 듣는 스미스를 좋아한답니다. 세상에 스미스를 좋아하는 젊고 예쁜 여자라니. 그전까지는 그림의 떡보듯 썸머를 보았었지만 이제 톰은 썸머가 운명이 아닐까 고민합니다. 저 여자가 내 전부/운명이 되어주진 않을까. 그리고 의외로 이건 짝사랑은 아닙니다. 썸머도 톰에게 호감을 느꼈거든요. 사실 그녀가 이성을 좀 쉽게 만나는 성격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둘은 잘 되고 연인같은 관계가 됩니다. 왜 연인 '같은' 이라는 표현을 썼냐면 썸머는 사랑같은 건 믿지 않거든요. lover라는 호칭을 쓰질 못하는 거죠, 본인이. 점점 더 진지해지는 톰과 관계안에 갇힐까봐 두려워하는 썸머. 결국 관계는 파국을 맞게 되고 톰은 반폐인이 되어 직장마저 관두게 되지요. 여기서 질문, 썸머가 나쁜 년이어서 톰을 버린걸까요? 아니면 톰이 멍청해서 그런걸까요?

 여하간 이후 둘은 다시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초대받아서 같이 다시 커플처럼 신나게 놀고 오지만 톰의 바람/예상과는 달리 썸머는 그냥 그를 흘러간 친구 하나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장도 관두고 인생의 끝에 몰린 것 같은 그지만 다시 전공했던 건축에 열의를 불태우며 결국 새로운 직장에 면접을 보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거기서 같이 면접을 본 다른 지원자 아가씨랑 잘될 것 같은 암시와 함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관계의 몇몇 진실은 이미 영화 '행복'의 리뷰를 통해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두루미와 여우의 이솝 우화를 생각하시면 되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접시에 담아 내놓으면 두루미는 먹기가 힘들지요. 관계라는 것이 그런 면이 있습니다. 톰의 입장에서 보면 썸머는 너무 차가운데다가 미래에 대한 생각도 전혀 없으며 자신을 진지하게 관계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 듯 합니다. 반면 썸머의 입장에서 톰은 그저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행위만 하고 있는거죠. 내적으로 불안정한 썸머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관계에 대한 생각만 계속 관철시키려고 하다보니 자연스레 맘에 떠나게 되는겁니다.

  외국 영화의 리뷰를 할때마다 항상 연기에 대한 평가가 가장 조심스럽고 어렵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대사의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하는데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표정과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는건 연기에 대해 채 반절도 말 못하는거죠. 그렇지만 이야기하자면,

 조셉 고든 래빗은 아역배우 출신이지만 전 그의 어린시절을 지켜보지 못했으니 어떤 이미지로서 받아들여지진 않아요. 다만 최근에 큰 작품들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500일의 썸머는 그의 시발점같은 작품이죠. 자연스러워요. 술먹는 장면이 많은 영화인데 술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 썩 괜찮은 연기라고 보여집니다. 감독이 실제로 술을 먹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의 헐랭한 모습을 보고 인셉션에서 무게를 잡아서 좀 충격받은 사람도 있다더군요.

 주이 디샤넬에겐 본인의 가장 예쁜 시절을 기록할 영화일겁니다. 최근에 드라마 new girl에서 나오는 모습보다 이때가 천배쯤 예쁩니다. 주인공이 예쁜게 강조가 되야 하는 영화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연기는 그럭저럭.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스스로 좀 고민하는 느낌.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예쁘고 귀여운건 톰의 어린 동생 역할로 나온 클로이 모레츠입니다. 지금에야 많이 커서 탑 배우중 하나가 되었지만 이때만 해도 킥애스보다 전인걸요. 인생 다 산 표정으로(실제로 오빠보다 훨씬 현명합니다) 톰을 위로하면서 때론 나무라는 장면은 정말 귀엽습니다.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를 해석하는 방식과 현학적 접근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이건 감독과 작가의 재능이지요. 특히 시간 배열을 그녀와 만난지 몇일째, 라고 보여주는 방식이나 시점이 달라지는 방식들은 꽤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다만 썸머를 이겨내고 새 여자를 만나는 과정을 굳이 톰이 꿈을 이뤄내는 과정과 함께했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만 놓고서는 톰은 독립적 자세를 이룰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한계짓는 것 같아서. 젊은 감독이 (사실상) 첫 영화를 잘 찍긴 했습니다만, 장치도 좀 과하게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구요. 뮤지컬같은 시도가 재미없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좀 뻔한 장르적 클리쉐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오프닝이 아주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작가 본인의 소재가 영화의 75%라고 하던데, 이런 자막이 나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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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NOTE: The following is a work of fiction. Any resemblance to any persons living or dead is purely coinci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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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ecially you Jenny Beck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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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tch.

(번역)

작가의 말 : 이어질 이야기는 모두 허구입니다. 혹시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죽었건, 살았건)이 있더라도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특히 너 제니 벡맨.


썅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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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첫째는 타이밍이요, 둘째는 진심이로다. 쉬운듯 어려운 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