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가즈아ㅏㅏ'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8.05.24 버닝 (2018, 이창동 /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posted by 박과장 2018. 5. 24. 11:32

[주의 :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버닝>은 종수와 해미, 그리고 벤 세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소설을 쓰려고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고 있고, 해미는 카드빚에 쫒기면서 후암동 좁은 원룸과 나레이터 모델 현장 사이를 오가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으로 보이는 그 둘은 우연히 재회하고, 해미는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을 다녀오면서 해미는 의문 투성이의 남성인 ‘벤’과 함께 귀국하게 되죠. 그는 종수의 표현을 빌리면 ‘개츠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젊은 나이에 아주 많은 돈을 갖고 재미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셋은 술자리를 함께하기도 하고, 벤의 친구들의 모임에 같이 가기도 하고, 종수의 파주 시골집에서 함께 대마초를 나눠피기도 하고, 기묘한 조합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해미가 사라지고, 종수는 벤을 의심하며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버닝>의 외표는 서스펜스 스릴러이지만, 실은 이 영화는 제 관점에서는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신자유주의(벤)의 인간 파괴와, 이를 간파하더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과(종수) 혹은 간파하지 못해서 타버리게 되는(해미) 구조의 문제를 지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벤의 삶은 화려합니다. 그는 항상 종수에게 당신은 너무 진지하다고 충고하면서, 좀 더 가볍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극의 초반부터 해미의 입을 빌려 등장하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가 각각 벤과 종수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허기, 즉 본능과 재미만을 쫒는 리틀 헝거와 존재론적, 본질적 허기를 달래고자 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대립인 것이죠. 그러나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부시맨의 사회에서는 그레이트 헝거를 추구하고 높게 평가하더라도, 자본주의가 상륙한 이후에는 그레이트 헝거는 별 가치가 없어집니다. ‘글을 잘 써서’ 칭찬받은 문창과 졸업생인 종수의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가 실제로는 실형을 막지 못한다는 점이나, 대학을 나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택배를 비롯한 막일 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재미있는 점은, 벤은 이 사실-본인의 욕구 추구가 어쩌면 더 낮은 차원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수가 좋아하는 포크너의 소설을 사서 읽어보려고도 하고, 마지막 결말에서 종수의 일격 이후에 오히려 종수를 공격하기 보다는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한 자세를 취하죠. 벤이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힌트는 이외에도 더 많은데요, 예컨대 해미를 사라지게 만든 행위를 비닐하우스 태우는 일에 빗대어 말할때, 쓸모 없는 비닐 하우스가 참 많고, 없어져도 한국 경찰들은 관심도 없다고 말하죠. ‘그레이트 헝거’인 종수가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떻게 구분하는가’라고 질문하자, 그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동시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요. '나는 반포에도, 파주에도 있다'는 선언은, 스스로가 인격체라기 보단 상징임을 의미하죠.


<버닝>이 단순한 장르물이 아닌 자본주의와 인간성의 관계에 집착하는 점을 보여주는 몇가지 단서들을 모아보죠. 먼저, 벤을 추격하던 종수가 미술관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벤을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종수가 그 장면에서 바라보게 되는 미술관의 작품은 다름 아닌 용산 참사를 다룬 것으로 보입니다. 용산 참사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재산권 분쟁으로 경찰 진압과정에서 여러 명이 사망한 사건인데, 사망의 원인이 바로 화재였죠. 영화 제목은 <버닝>, 용산참사가 그려진 작품 바로 건너편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벤과 가족들. 이 정도면 매우 직접적인 상징이죠. 게다가 해미의 집은 참사가 일어난 바로 근처인 후암동인데, 후암동이라는 지명을 자꾸 화면에 노출시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종수와 해미의 고향으로 제시된 파주라는 공간입니다. 끊임없이 북한의 선전방송이 나오죠. 그러나 그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예컨대 종수와 해미가 과거에는 자본주의로부터 침략당하지 않아서 행복하게 지냈던 공간이지만, 이미 이제는 점령되었고(벤이 굳이 파주까지 올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이를 경고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북한에서는 끊임없이 방송이 나오지만, 실은 그쪽 조차도 제대로 된 해결방법은 아니며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습니다. 


이 외에도 예술가로서의 종수의 성장, 최승호 MBC사장이 분한 종수 아버지와 종수의 관계(최승호 사장이 이창동 감독의 경북고 후배라나요) 등 아직 리뷰에서도 풀어낼 떡밥이 아주 많지만, 이에 대해서는 2회차 관람 이후에 더 자세히 적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기에 대해서는 전종서의 연기에 대한 코멘트가 많던데, 대체로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많더군요. 그런데 저는 이게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봅니다. 일전에도 리뷰에 적었던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의 조금은 비현실적인 톤이 사랑의 비극을 더욱 강조해주듯이, 어쩐지 붕 떠있는듯한 전종서의 연기톤은 안정되지 못한 캐릭터의 내면을 더욱 강조해주는 효과를 지닙니다. 이창동은 테이크를 아주 많이가서 ‘변태 감독’이라는 말까지 듣는데, 이걸 통제에 실패했다고는 전혀 보이지 않아요. 



유아인은 본인을 확실한 주연급 배우로 자리잡게 해주는 역할을 드디어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굳이 이 글에선 그의 개인사를 둘러싼 논란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요, 지금껏 흥행에 성공한 주연작들은 많았지만 대부분 다른 강력한 주연배우들과 함께였고 그들의 연기가 더 빛났던 영화였습니다. 예컨대 <사도>는 송강호와 함께, <베테랑>은 황정민과 함께 주연을 맡았으니까요. 스티븐 연은, 한국어 연기임에도 불구하고(물론 교포 역할이지만) 자기가 해야할 것을 정확히 아는 배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색한 한국어가 웃길 수도 있는데, 서늘한 느낌을 주는게 비언어적인 통제가 잘 되어있는 프로페셔널로서의 강점이 잘 보이더군요.


서스펜스라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적 재미와, 넘치게 많은 상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영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청춘’을 다루었다는 이창동 감독의 언급은 약간 블랙 코미디로 느껴질 정도로, 이 영화에서 불타고 있는건 젊은이들 뿐만은 아닙니다. 감옥에 있는 종수의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종수의 어머니에게도 500만원의 빚을 받으러 찾아오는 검은 옷을 입은 존재가 있지요. 아마 어머니에겐 그 존재가 ‘벤’이 아닐까요.


<이 리뷰는 2회차 관람 이후 수정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