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박과장 2012. 4. 23. 03:07

 


 인터넷에서 쓰는 말 중에 '게슈탈트 붕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게슈탈트는 독일어로 형태, 와꾸, 뭐 이 런 뜻인데 이게 붕괴된다는 말인데... 쓰이는 의미는, 어떤 단어를 계속 반복해서 말하거나 연상하면 그게 그 단어로 느껴지지 않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실거에요. 하나의 단어를 계속 쳐다보면 이게 활자 내지는 그림으로 느껴지고 자연스레 떠오르던 의미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일.


 쌩뚱맞게 영화 리뷰에서 게슈탈트 붕괴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건, 어떤 개념을 아주 본질적으로 파고들면 애초에 우리가 막연히 희미하게 생각하던 특성들이 없어지게 된다는 이야기가 하고싶어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세요. 그 단어가 주는 느낌과 실제 여러분의 가족과의 삶을 비교해 보세요. 전자는 상징이고 후자는 본질입니다. 똑같이 느껴지시나요? 글쎄 같진 않을겁니다. 본질을 파고드는 순간 상징의 대표성은 사라지고 현실이라는 무거운 침전물이 남습니다. 찝찝하지만.


 허진호 감독은 꾸준히 멜로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전작 '봄날은 간다'가 그러했듯이, 이번에 이야기할 영화 '행복'또한 사랑이라는 일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상징은 사라지고 무거운 현실이 남습니다. 줄거리로 들어가 보죠.


 남자 주인공 영수(황정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흥청망청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클럽을 운영하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옆에서 자고 있는 여자가 거의 바뀌는, 그런 종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클럽은 망하고, 만나던 애인은 떠나가고. 결정타는 끊임없이 부어댄 술때문에 간경변에 걸려버린거죠. 이에 주변사람들에게는 유학간다고 거짓말을 해놓고는 시골에 있는 요양원 '행복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행복의 집에서 8년째 살며 스텝으로도 일하고 있는 은희(임수정). 심각한 폐질환을 앓고 있지만 굉장히 긍정적으로 살고 있습니다.(이 긍정적인 자세가 과연 좋은 것인지는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 하지요) 심하게 숨이 차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굉장히 적극적으로 사는 여자에요. 영수에게 오히려 먼저 다가가서, 연애를 제안합니다. 집칸은 남아도는 시골이니, 같이 살지 않겠냐고.

 

 여기까지는 우리가 자주 보던, 혹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전개입니다. 힘든 세상, 사랑이라는 구명줄, 서로에게 반하는 남자와 여자. 은희는 굉장히 섬세하고 영수를 잘 챙기는데다가 싹싹하고 예쁘기까지 합니다. 같이 시골에서 세간살이를 장만하면서 신혼생활 비슷한걸 즐기죠. 심지어 영수는 그녀의 지극정성에 몸도 거의 완쾌가 되고, 케어를 감사하면서, 참 행복하다, 라고 느낍니다만.


 그때 그 전에 만나던 애인 수연(공효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영수에게 이야기하죠. 이거 너 살던 모습 아냐. 너 이렇게 살아서 좋니? 이 질문을 살작 바꿔서 이야기하면, 이거 니가 알던 행복이 아냐, 너 정말 행복한거 맞니? 아, 영화의 제목은 이래서 행복이군요.


 사실 영수도 꽤 답답함은 느끼던 차였습니다. 영화 내에서 몇몇 장면을 복선으로 보여주기도 하죠. 삶의 형태가 갑자기 달라졌는데, 그 순간이 아무리 즐거워도 오랜 세월 다져진 본성은 벗어낼 수 없는 것일까요. 영수와 은희의 다툼이 생기고 영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날 버려줘, (왜냐하면) 나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아주 전형적인 죄책감 피하기죠. 사실 은희는 영수에게 참 잘해줬거든요. 그러니 은희를 버리겠다고 말하는건 영수 스스로 개새끼가 되는 길이니까. 이에 은희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내가 그여자보다 잘해줄게, 나 정말 잘할수 있어 나 진짜 잘할수 있어.

 결국 영수는 은희를 떠나고, 홀로 남았던 은희는 이내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영수는 다시 알콜중독이 되어 재활센터를 전전하다가 은희의 임종을 듣고 그녀의 유품들을 보며 울부짖습니다.


 읽는 분들에게 한번 더 질문을 드려봅니다. 은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영수는 행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희때문에 불행해서 자신을 버려달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러면 둘이 신혼생활을 즐겼던, 그때 행복이라 믿던 것들은 대체 다 뭐랍니까?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를 재료로 하는 멜로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나아가 허진호라는 감독이 그리는 말하는 사랑이라는 행위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며 눈물짓지만 결국 그 상대방이 다시 손을 뻗어왔을때 이미 마음이 식어 웃어 넘기기도 하고('봄날은 간다') 행복을 주던 그 행동들도 마음이 떠나면 귀찮고 나를 옭아매는 밧줄처럼 느껴집니다.('행복') 

 결국 대화에 비유하자면, 둘이 같은 언어를 써야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 하려고 해도 한명은 중국어를 쓰고 한명은 일본어를 쓴다면 좋은 결과가 일어나지 않겠죠.

 하지만 마음이 달아올라있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것이 그 사랑이라는 감정입니다. 이 과정에 서툰 등장인물들은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 행복의 임수정) 자신을 낮춰서, 세상에서 흔히 찌질하다고 말하는 캐릭터가 되므로서 상대방을 잡아보려고 하죠. 결과는, 현실이 그렇듯이 실패지요. 이들이 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허진호 감독의 세계 안에서의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허진호 감독의 세계와 실제 세계가 얼마나 다르냐면.... 거의 같겠지만.) 언젠가 다른 리뷰에서 허진호 월드에 대한 정리도 한번 해봐야 할듯 합니다만.

 여하간, 그래서 은희가 죽은 뒤 황정민이 그녀의 옷가지를 붙잡고 오열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사족으로 느껴집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일방성을 드러내기 위한 영화인데, 뒤늦게 죽은 그녀의 흔적을 찾는 그의 모습은 돌아온 탕자 클리쉐인데다가 논점 이탈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또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이 상황에 클리쉐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이유는 이미 많이 보고 듣고 느껴왔던 일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녀를 떠나고 다시 폐인이 되었을때 영수는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을겁니다. 하지만, 그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때부터 영수와 은희의 시간은 영수에게는 불행이었습니다. 그건 본질적으로 불행 맞아요. 영수가 원치 않는 상황이니까. '행복일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고 말하는게 정확합니다. 다만 돌아온 탕자가 된 영수가 반성해야할 것은 아, 그게 행복이었어 가 아니라 아, 그걸 행복이라고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가 되어야겠죠. 영수의 입장쯤 되면 이미 거기까지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배우들 이야기를 좀 해보죠. 황정민은 성실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배우입니다. 성실한 연기를 합니다. 행복에서도 그렇죠. 헌데 앞부분에서 흥청망청 노는 역할에 좀 어울리지 않는건, 작품이 거듭할 수록 본인의 이미지에 좀 매몰되는 느낌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직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그를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 좀 뺀질뺀질하고 유려한 연기를 한번쯤 보여줌으로서 본인 연기의 스펙트럼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에서 그의 연기가 별로라는 얘기라기보다는, 너는 내 운명 이후로 맡은 역할들에 대한 불평입니다. 


임수정은, 예쁜 배우들이 흔히 듣는 연기 못한다는 편견에 대해 어느 정도 피해를 보고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연기를 아주 잘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배우지요. 아직 어떤 배역을 맡아도 임수정이 보이니까. 대중 매체에서 CF로 자꾸 소비되는 것도 문제구요. 다만 이 영화에서는 본인에게 어울리는 배역에 잘 캐스팅 되었습니다. 폐병 환자 클리쉐에도 맞고. 이 외에 공효진 정도가 비중있는 배역인데 그나마도 얼마 나오질 않아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사실 이토록 이기적이어서, 나에게 헌신적인 이에게는 매력을 느끼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매력이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매력을 느끼려고 노력하는건 좀 우습지만, 우리는 영수와 은희를 보면서 나에게 정말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지 고민해볼 필요는 있을겁니다.

한줄평 : 찌질한거 함부로 까지 마세요. 다 그런적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