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박과장 2012. 4. 19. 23:50

 

 

 고다르와 트뤼포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더라도, 일반 대중들에게 프랑스 영화는 친숙했던 적이 별로 없습니다. 오드리 토투에 힘입은 '아멜리에' 정도가 그나마 친숙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다만 미셸 공드리는 등장부터 난해하지 않았어요. 제대로 된 첫 장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휴먼 네이쳐'에서부터 그는 코미디를 선택하고 (당시로서는) 젊은 감독의 재기발랄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이터널 선샤인'에서의 그는 재기 발랄함 보다는 내밀함에서 좀 더 빛나지만요.
(물론 영어로 된 미국영화를 찍는 미셸 공드리를 프랑스 영화의 기수로 이야기 하는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짙게 받은 장면 하나하나에서 이 냥반은 뼛속까지 프랑스인이구나,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러브스토리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둘이 만나서, 사랑했다가, 헤어지게 됩니다. 서로가 잊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이야기가 우리의 세상과 엇나가는게, 영화 속은 우리가 사는곳과는 일종의 평행우주여서 과학의 발전으로 특정한 기억을 지울 수 있게 됩니다. 여자가 먼저 기억을 지우고, 이를 알게 된 남자도 기억을 지우게 됩니다. 아, 그런데 기억을 지우고도 서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사실 기억을 지운다는 소재와 사랑이 만날때, 이야기는 의외로(?) 진부해지기 쉬워요. 간단합니다. 오랜만에 소월시를 한자락 읽어볼까요? "오늘도 어제도 아니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그러니까 운명이라서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가 되면 너무너무 진부해서 남자 분은 극장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함께 들어간 연인에게 이렇게 소리치겠죠. 내가 이래서 멜로 보지 말자 그랬잖아!

 헌데 이 영화, 의외로 기억을 지운다는 행위의 본질에 파고듭니다. 재미있는 상상력 하나.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끈끈하게 다른 기억들 사이에 파고 들어있다는 것. 그리고 기억을 지우는 동안 그 기억들을 여행해야 한다는 것. 남자가 기억을 지우는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는데 그 와중에 그는 트라우마와 마주하기도 하고, 여자와 함께했던 가장 행복했던 날을 기억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건 거의 '올드 보이'에 나온 인생복습과 비슷한 겁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위해 다시금 꽁꽁 싸매두었던 과거를 낱낱히 읽어내야 한다니, 세상에, 기억은 파고들수록 더 강해지는 것 아니었나요. 이 역설 속에서 남자는 여자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에 도달하지만 여자에 대한 기억은 진공청소기에 빨려들어가듯 사라지죠.

 이 외에도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에는 퇴행을 비롯해 재미있는 정신분석학적 상징들이 많습니다. 찾아보시면 재밌을 거에요. 여하간 이 과정을 그냥 나열하는 대신에 기억의 단절이라는 소재를 더 부각 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상 진행을 한번 꼬아놓습니다. 맨 처음에 맨 마지막에 들어가야 될 장면을 보여주는 거죠. 사실 현대 영화에서는 너무 익숙한 편집 테크닉이 되어버렸습니다만... 영화가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두번 '새롭게'만나는 장면을 보여주다보니 깜찍한 트릭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어요. 좋은 양념입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는 시각 효과인데, 이게 뭐 3D나 이런게 아니고... 뭔가 몽환적인 기술들입니다.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의 문제죠. 예쁜 그림도 잘 잡으면서. 영화판에서는 미장센이라고 하나요. 화면 안의 모든 것을 자기 뇌 속에서 통제된 그림으로 잘 표현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의 영상을 보고 뷔욕이 괜히 데려다가 본인 뮤직비디오를 찍게한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원안을 미셸 공드리 감독이 제공하긴 했지만 이를 훌륭하게 담아낸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도 칭찬할만 합니다. 워낙 '어댑테이션'이나 '존말코비치 되기'에서 좋은 시나리오로 인정받은 작가입니다. 어찌되었건 미셸 공드리감독의 모국어는 프랑스어기 때문에, 영어로 된 영화를 이렇게 만들어낸데에는 그의 시나리오가 중요했을겁니다.

 짐 캐리가 '마스크', '에이스 벤츄라'에서 어마어마한 코미디 연기를 선보일때, 우리는 그게 그의 한계인 줄 알았었죠. 사실 엄청 웃겨서 그렇지 생각보다 잘생긴 배우기도 합니다만. 그는 이 한계를 '트루먼쇼'를 통해 박살냅니다. 다들 보셨잖아요? 사실 트루먼 역할이야말로 모든 남자배우들의 로망 중 하나일거에요. 세상 전체가 짜고 한명을 속이는데 그 억울함을 표현해 낼 기회라니. 그런데 트루먼 캐릭터 자체도 그렇고 바로 전작까지는 코미디 위주의 역할을 했었던 짐 캐리여서, 약간은 코미디 기가 남아있었는데, 이터널 선샤인의 그를 보면 눈물부터 납니다. 세상에 전혀 웃기지가 않아요. 이런걸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 죽이는 연기라고 할 수 있겠죠. 극찬하지 않을 수 없는 연기입니다.

 케이트 윈슬릿 또한 타이타닉의 이미지때문에 의외로 손해를 좀 봐왔던 배우였죠. 사실 성격파 배우에 가깝거든요. 아주 예쁜 얼굴도 아니고...어쩌다 타이타닉의 히로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터널 선샤인에서 드디어 몸에 맞은 옷을 입은 사람 같습니다. 머리 색 하며, 약간 현실에서 붕 떠있는 듯하면서도 충동적인 캐릭터. 어떻게 보면 연기하기 편한 축에 드는 역할입니다마는 그래도 호연을 폄하하긴 쉽지 않을겁니다.

 어떤 기억은 사람을 지탱해서 살아가게 하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사람을 좀먹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모든걸 품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제의 나를 뿌듯해하거나 혹은 어제의 나와 싸우거나 그 중간쯤에 서있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기억을 지운다고 그 전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는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영화의 말미에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고백하고 여자는 우리가 또 그렇게 되면 어떡하냐, 자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때 남자주인공의 한마디, 상관 없어요. 되묻는 여자. 상관 없어요? 네, 상관 없어요.

 그렇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서 미워하게 될지 걱정하는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한줄평 : 기억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사람도 있습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