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박과장 2012. 4. 23. 01:27

 


 살다보면 참으로 우울한 날이 있습니다. 마음먹은대로 일이 되지 않을때, 아무도 내 말에 귀기울이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때. 사람마다 이런 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여기에 리뷰를 써댈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는 저는 챙겨보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영화, 특히 한국영화에 관심을 쏟게 된 작품이 바로 이 작품, '파이란'입니다. 어쩌다 보니 영화리뷰들이 멜로로 쏠리는 것 같습니다만 기왕 요새 연애도 못하는거 멜로 영화 얘기라도 열심히 해야죠.


 


 영화 파이란의 세계는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때리는 일보다 맞는 일이 더 많은 삼류 건달인 남자주인공 강재(최민식)는 인천 항구바닥에서 그냥 성인오락실이나 지키며 살아갑니다. 새파란 애들은 능력도 돈도 없고 꼬장만 피우는 그를 개무시하죠.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유일한 꿈은 배를 한척 사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인데, 그럴 돈이 어디 있나요.


 한편 여자 주인공 '파이란'인 장백지는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유일한 친척인 이모를 보러 한국에 간신히 오는데 이미 이모는 캐나다로 떠나고 없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그녀. 중국에 다시 돌아갈 순 없으니,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하게 됩니다.


 돈이 필요했던 강재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위장결혼을 합니다. 그렇게 이 둘이 이어지게 되는데 사실 이 위장결혼이란게 서로 만나거나 하는게 아니라 대충 서류랑 인감으로 이루어지는 암거래라서, 그냥 이름만 대충 가져다 쓰는 일에 불과하죠. 서로 사진 정도만 교환합니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이를 단속하기 위해 단속반원이 같이 사는지 확인차 단속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영화 '댄서의 순정'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오죠)


 파이란은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에 살면서 이런 저런 고생을 합니다. 꽤 강도높아 보여요. 하기사 국적취득까지 해준 사람들이 그 이상으로 부려먹겠지요. 그러면서 삶의 모든 끈이 사라진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서류상으로나마 부부인 강재입니다. 한국말을 조금씩 배워가면서 강재에게 보낼 편지를 여러 통 쓰지만 막상 보낼 용기는 없습니다.


 자 여기까지만 줄거리를 요약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이상 말하면 스포일러이기도 하고... 하지만 중요한건 인생의 끝자락에 몰린 두 사람에게 남은 희망은 서로밖에 없다는 거지요. 



 '파이란'이 정말 좋은 멜로 영화인 이유는 멜로 장면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때까지 단 한번 만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상황이 둘을 서로의 마지막 끈으로 만들어요. 잡을 수 없는 끈.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에 유일한 끈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방을 죽기 전에 한번도 볼 수 없는 답답함. 그게 이 영화를 지배하는 감성입니다.

 최민식의 연기는 아무래도 연극배우 답게 기존에는 좀 캐릭터가 강했었는데(북한군 역할을 했던 '쉬리'에서 절정을 이루지요) '해피엔드'를 통해 절제하는 연기를 보여주기 시작하더니 파이란에서는 굉장히 섬세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사실 최민식이 이렇게 절절하게 멜로 연기를 하는 영화가 많지 않죠. 아니 없다고 보는게 맞을겁니다. 


 '성원', '희극지왕'등을 통해 꽤 입지를 쌓은 장백지가 이런 작은 규모의 한국영화에 출연한 것은 조금 의외입니다. 역할이 좋긴 하지요. 촬영하면서 고생을 엄청나게 했다는 후문을 들었는데, 그럴법한 장면이 엄청 많아요. 장백지의 얼굴은 참 잘 정돈된 느낌을 주는데 비극적인 캐릭터와 맞물려서 좋은 결과물이 나왔어요.


 이 외에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조연들이 많습니다. 용식 역의 손병호(최근에 많이 유명해졌죠?)의 노련한 건달 연기도 좋았고 강재의 유일한 친구로 보이는 경수 역의 공형진도 빛납니다. 


 감독 송해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많은 작품의 조연출을 했었고, 대차게 말아먹은 '카라'라는 영화로 데뷔할때만 해도 다들 크게 기대하는 감독이 아니었으나 다음 작품인 바로 이 '파이란'을 통해 크게 인정받게 됩니다.(39회 대종상 영화제 감독상 수상) 이후 '역도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으로 홈런까진 아니더라도 연타석 안타를 때려내죠. 뒤에 '무적자'로 삼진 아웃을 먹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송해성의 영화중에 '파이란'이 제일 좋습니다.


 원작이 있는 영화입니다. 철도원으로 유명한 아사다 지로의 단편 '러브 레터'가 원작입니다. 모티브는 같은데 디테일은 좀 다르고. 책이 워낙 좋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기회되시면 읽어보세요.


 리뷰 처음에 언급했듯이, 소통이 좌절되었다고 느껴서 힘들때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힘겹게 서로를 원하는데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이들이 있는데, 라면서 한번 눈물 빼고 나면 좀 개운해져요. 

  

 파이란은 강재에게 죽기 전 보낸 편지를 통해, 당신 덕분에 이곳에서 일할 수 있다. 감사하다. 당신은 참 친절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강재가 왜 이 편지를 보고 그리 눈물지었을까요.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고맙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파이란의 눈으로 본 강재는 멋지고 든든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삼류로 만드는건 후진 세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줄평 : 가끔 마냥 사람이 믿고싶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