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박과장 2019. 3. 13. 02:54

쿠루메-후쿠오카 여행기(2)


첫날은 여관에서 훌륭한 저녁식사에 곁들여 하이볼을 홀짝인 뒤 쿠루메 시내로 나가 칵테일을 마시면서 사장님, 스텝, 단골 커플 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안되는 일본어로 나누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놀라워 한건 도대체 왜 쿠루메로 놀러왔냐는 거였다. 여긴 아무 것도 없어요, 라고 바 사장님이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안하러 왔어요. 인생에서 아무 것도 안하는 건 정말 어렵던데요. 그러자 바에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말이 서툰 외국인에 대한 친절인지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어렵지. 아무 것도 안하는 건 정말 어려워. 꽤나 오래 이야기를 나눠서 엔간하면 사진이라도 찍었을 텐데 왠지 아무 것도 안하러 와서 기념사진을 남기긴 쑥스러워 사진은 남기지 않았다. 그래도 캄파리 소다는 맛있었어요 마스터. 이 글은 못보겠지만.





비행이 짧아도 비행은 비행인지라 피곤하기도 하고, 술도 꽤 마셔서 잠을 잘 자고 일어났다. 내가 여관에 체크인 한게 일곱시쯤. 저녁식사를 하고 목욕까지 하고 바로 나선게 여덟시 반쯤. 다시 여관으로 돌아온게 열두시쯤. 평상시에는 수면 패턴이 훨씬 밀려있지만 피곤이 몰려와 거의 바로 잠들어 일곱시 반쯤 깼다. 전날 프론트에 여덟시 반쯤 아침을 차려달라고 얘기해놔서 이리저리 다다미 방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식당에 내려가니 여관 할머님이 밥을 차려주셨다. 전날만큼 화려한 구성은 아니지만, 정갈하고, 아침의 까끌거리는 입 안을 헹궈줄 된장국도 있고, 샐러드며 연어 구이 등등 입맛 돋구는 반찬이 많았다. 나 미닛메이드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오렌지 주스도 주셨다. 전날은 몰랐는데 밥은 식탁 위에 전기 밥솥을 올려주시면서 모자라면 얼마든지 드시란다. 예,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같은 게 있다면 아마 이 집의 밥일겁니다.



원체 관광지라는 것 자체가 많지 않은 쿠루메지만(사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그다지 큰 볼거리가 아니더라도 홍보물을 훨씬 잘해놓는 경향이 있는데, 쿠루메는 그마저 얼마 없더라. 아,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아름다운 도시..) 그래도 이런 저런 팜플렛에 60미터가 넘는 관음보살이 있다고 해서 관광객으로서의 본분을 조금이나마 지켜보고자 열두시쯤 여관을 나섰다. 빗줄기가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는데 일기예보에서도 잠깐 스쳐간다고 하고, 우산을 사는게 돈도 돈이지만 여행객은 짐이 늘어 불편하니 영 꺼려졌다. 사진은 저 멀리 보이는 관음보살이다. 주변 차량 크기랑 비교해보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다. (지금 웹 검색을 해보니 풀 네임은 '구세자모대관음보살', 혹시 놀러가실 분이 있다면 JR 쿠루메 역에서 버스로 15분 정도 걸린다. 가까움.) 사진에서도 드러나지만 이때쯤 비가 꽤 내리기 시작해서 나는 온통 젖어버렸는데, 이게 사람 심리가 묘한게 꽤 젖어버리니까 또 우산 사기가 싫더라. 기왕 젖은거 뭐.. 싶어서.


가까이서 보면 더 거대하다. 그런데 입구에서 입장권(500엔)을 구매하는데 직원분이 관음보살님의 뒤에 ~~~~가 있습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그게 뭔지는 일본어가 짧아서 잘 못들었는데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건지 가보면 되겠지라고 가보았더니...



이 사진은 놀랍게도 관음보살님의 몸통 안이다. 그니까 저 관음보살이 계단을 빙글빙글 올라가는 일종의 전망대 같은 거였다. 관음보살의 뒷편에는 이 계단 통로의 입구가 있었다. 끝까지 아픈 다리를 이끌고 올라가면..




이런 뷰를 볼 수 있다. 다소 비싸다고 생각했던 입장권이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놀랍게도 도로 내려오자 지하로 이루어진 시설이 있었고, 그 곳에는 불교 전통의 극락과 지옥을 묘사해놓은 박물관과 시설이 있었다. 특히 이 지옥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사진 촬영 하지 말라고 써있어서 딱 한장만 찍었다. 기억에 남기려고)


일단 처음에 들어가면 손을 얹는 틀이 있다. 그곳에 손을 얹으면 염라대왕님이 너는 무슨무슨 지옥에 가야 한다고 선언함. 그리고 뒤를 지나가면 온갖 지옥들에 대한 묘사가 되어있는데, 이게 불이 꺼져있다가 사람이 들어가면 센서가 인식되서 팟 하고 불이 켜지면서 저 인형들이 움직인다. 혼자 갑자기 이런걸 보니 좀 무섭기도 했다. 그리고 지옥 코스가 끝나면 다시 손을 얹는 틀이 나오고 어느 동물로 환생할지가 나온다.

나는 고양이였다. 비를 맞아서 길고양이같았나. 아무튼 아래 코스까지 다 보고 나니 500엔이면 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바람을 맞고 돌아다녔더니 뜨끈한 국물 생각이 나서 구글에서 꽤 평점이 좋은 라멘집을 찾아 걸어갔다. 버스도 있긴 있었는데 시골이라 그렇게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이날 이래저래 걸어다니니 10km 정도는 걸은 것 같다. 참고로 쿠루메가 유명한 몇개 안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돈코츠라멘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꼭 쿠루메가 아니더라도 도쿄를 비롯한 관동의 라면과 비교했을때 훨씬 맛이 낫기에 규슈에서는 라면을 많이 권한다고들 한다. 내 입에도 그랬다. 물론 한국 사람 입맛에는 대체로 짜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소로 향하는 길. 저 멀리서 비가 그쳐오고 있었다. 평범한 주택가 풍경이지만 날이 개는 모습과 너른 풀밭에서 왠지 모를 노스텔지어가 느껴졌다. 유년기를 아파트촌이 아닌 주택가에서 보내서 그런지 이런 낮은 주택들이 연이어 들어찬 풍경 쪽이 훨씬 더 사람 사는 느낌이다. 하루종일 비를 맞다가 날이 개는 것을 목도하면서 잘 풀리지 않았던 최근 몇년도 이렇게 개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매일 비가 오진 않겠지.





다시 숙소로. 욕탕이 갖춰저 있는데 손님도 별로 없으니 늘 개인탕을 쓰는 기분이 들었다. 목욕 후 식사를 하려 내려오니 오늘도 진수 성찬이다. 전골 정식인데, 전날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그렇고 개인 화로를 주는건 참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배부르게 먹고 또 술한잔 하러 시내로 나가려다가 숙소 앞 24시간 대형 마트에서 간단한 안주랑 캔맥주 몇 개를 챙겨 들어와서 천천히 마셨다.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목욕까지 했는데도 잠이 잘 오지 않아 간신히 서너시간쯤을 잤다. 딱히 어떤 생각에 꽃힌 것도, 무언가에 크게 몰두 한 것도 아닌데 이리저리 핸드폰을 하다 한국의 일들을 생각하다가 거의 밤을 새버렸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서 온 여행인데 여전히 한국의 일들을 머리에서 비우지 못하는게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도 숙소에 있던 동전 세탁기에 비 맞은 빨래 돌렸던 것을 밤새 온풍기에 이리저리 뒤집어 줬더니 깔끔히 말라있었다. 


쿠루메-후쿠오카 여행기(3)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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