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박과장 2019. 3. 18. 03:38

쿠루메 - 후쿠오카 여행기 (4 - 마지막)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되었다. 잘 생각해보니 후쿠오카에 오랜만에 왔는데 4일 동안 나카쓰 강변을 제대로 걷지도 않았더라. 오전 12시 비행기인데 전날 과음도 하고 숙소에서 좀 미적대다 나오니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날씨가 쨍한건 좋았다. 3일 내내 비가 오거나 흐렸기 때문이다. 한강이든, 탬즈 강이든, 나카쓰 강이든 강물에 햇볕이 부서지는 장면은 늘 기분 좋다. 


공항으로 가는 전철역 인근에 호빵맨 박물관이 있었다. '어린이' 박물관이라 갈 생각도 안했었는데 문득 내가 호빵맨을 봤던 시절에는 어린이 었으니까 갔어도 괜찮은 추억이지 않을까라고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평일 오전에 서른이 다 된 아저씨가 홀로 들어가기에는 좀 감정적 장벽이 있는 곳인듯.


이때부터 사진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공항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가다가 여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권의 부재는 여행 막바지의 아쉬움따위에 감상을 낭비할 수 없을만큼 내 감정상태를 공포로 몰고 갔다. 내가 그래도 해외여행을 자주 안다니던 사람은 아닌데, 전철을 타다가 여권을 떨어트리다니.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아직도 그 여권이 정확히 어떻게 내 손을 떠났는지 모른다. 다만 일주일쯤 시간이 지나 영사관으로 부터 내 여권이 내가 간 적이 없는 전철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뿐이다. 왜 나는 여권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을까? 피곤함과 고단함 때문에 주의 집중력이 떨어졌기 떄문일까?


여권이 없는 지도 모르고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발권 카운터로 가다가 여권이 없어졌음을 깨닫고, 일단 항공사 카운터로 뛰어가서 사정을 설명했다. 다행히 크지 않은 추가요금을 내고 비행기 시간은 변경할 수 있으니, 일단 여권을 찾아오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전철역 분실물 센터에 전화를 걸어 되도 않는 일본어로 공항 역에서 발견된 여권이 없냐고 물었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답을 받았다. 영사관에 전화를 했다. 의외로 나같은 사람이 많은지 간단한 서류작업을 통해 임시 여권을 발급해 줄 수 있으니 비행기 시간에 맞출 수 있게 되도록 빨리 영사관으로 와달라는 답변을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다음날이 아닌 이 날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만약 후쿠오카가 아닌 거의 모든 다른 도시였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가고시마 같이 작은 동네도 공항은 시내에서 차로 1시간 이상 가야 하는 곳에 떨어져 있는데, 유독 후쿠오카는 시내와 공항이 인접해 있다. 시내 중심지에서 공항이 전철로 20여분이고, 영사관이 있는 지역까지도 공항 셔틀버스 20분+전철 30분 정도면 갈 수 있었다.


영사관에 도착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500엔 짜리 증명사진 기계로 사진을 찍고, 20여분 정도 몇장의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하니 영사관 직원분께서 한시간 반쯤이면 여권의 역할을 하는 임시 여행증명서가 발급된다고 설명해주셨다. 집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제서야 하루종일 뭘 제대로 먹은 적이 없다는 것이 깨달았다. 배고픔과 나른함이 몰려왔다. 영사관이 있는 지역은 매우 조용한 주택가였는데, 영사관 바로 건너편에 큰 쇼핑센터가 있었다. 쇼핑센터 푸드코트에서 나가사키 짬뽕을 주문했다. 



면의 양을 무료로 대 혹은 특대로 더 넣어줄수 있다고 했는데 거절했다. 내가 항상 느끼는건데, 왜인지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인들은 소식하는 이미지로 알려져있지만, 일본 식당의 1인분은 항상 한국 식당의 그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뜨거운 국물을 속에 넣자 조금은 기운이 돌았다. 사실 영사관에 가는 길은 마음도 급하고, 일이 해결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니 정신이 하나 없었지만, 식사를 하고 나오니 꽤 조용하고 고즈넉한 동네였다. 집들도 좀 비싸보이고. 


여권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니 여러 상념이 머리를 든다. 그 중 재미있던 것은 해외에서 여권이 없는 나는 그냥 불법체류자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상황이였다는 부분이다. 현지 경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면? 나의 존재를 어떻게 규명해야 하는가? 비교적 선진국이라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본같은 국가가 아니라 열악한 국가였다면, 내가 현지 언어를 전혀하지 못한다면 나는 누가 되는 것인가? 다시 원점으로. 말하자면 잘해야 두툼한 종이뭉치인 여권의 존재 유무가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내가 홀로다니는 여행을 즐겼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갖고 있는 수많은 관계, 출신 학교, 배경, 지역 등등이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내가 행하고 말하는 '나'를 사람들이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함께 술도 마시는 경험을 하게 해주기 때문인데, 결국 그러한 배경과 맥락이 없는 나와 한국에서의 나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수단이 여권인 것이다. 


학부 당시에 유럽 난민 문제가 심각할 때, 유럽 정치를 가르쳐주시던 은사님께서 들려주셨던 일화가 떠올랐다. 너희가 난민이면, 새로운 땅에 발을 딛게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거같아? 자신의 신분을 없애는 거야. 어느 말을 하는지도 모른 척하고, 너를 규정할 수 있는 모든 서류를 없애는거야. 다시 너를 니가 온 곳으로 보낼 수 없도록. 그런데 여권이 없어지면, 법적인 나의 존재규명이 붕괴되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될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럼 여전히 내가 나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내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미친 영향력이, 내가 쓴 글이, 나의 사진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내가 시간이 지나 세상을 떠나도 나는 계속 이곳에 있는 것일까?



아무튼 결국 이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공항으로 돌아와서 한시간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끊을 수 있었다. 햇수로 5년정도 사용했고, 출국 횟수로는 15회 가량의 도장이 찍혀있는 여권이 없어졌다는 것이 추억이 날아 간 것 같아 좀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말하자면 좋은게 좋은 거라고 그냥 애초에 이 여행의 목적이 그러했던 것 처럼, 1쿼터를 마치고 2쿼터로 넘어가려는 사이의 휴식시간을 거쳤으니까 새로운 여권을 들고 삶을 살아가는 일도 그리 나쁘지 않게 여겨졌다. 


아, 그리고 한국에 원래 오후 1시반쯤 도착해서 충분한 휴식 후에 저녁 8시에 출근하는 일정이었는데, 여권 소동때문에 일이 꼬이는 바람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공항철도와 택시를 이용해 출근을 했다. 하루종일 긴장상태로 있다가 긴장이 풀리자마자 출근을 해서 일을 하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평소엔 그리 즐기지 않지만 땀이 쏙 빠질 만큼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퇴근을 하고 집에 누워서야 한국에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루메 - 후쿠오카 여행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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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배경음악이 없으시다면 제가 글 쓰면서 들은 음악 링크...)



쿠루메 - 후쿠오카 여행기 (3)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내서 입안이 좀 까끌거렸지만, 킨스이 여관에서의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하니 묘한 아쉬움이 들었다. 아침 식사는 오믈렛과 생선구이 정식. 역시 깔끔했다. 이제, 후쿠오카 시내로 가야 한다. 쿠루메에서 기차로 30여분. 이 전날 저녁에서야 맥주를 마시면서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WBF 호텔을 예약했다. 이 정도로 무계획 해도 될까 싶었는데, 뭐 아무럼 어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예약을 직전 특가 같은 개념으로 싸게해서 더 그랬나.



내가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 유일하게 모으는 물건이 있다면 베어브릭일 것이다. 한 일년 전부터였나, 나는 이 팔다리 짧은 곰 모양 인형에 함락당하고 만 것이다. 이제는 여행을 안가더라도 이베이를 뒤져서 사기도 한다. 유독 작년-올 초까지 일본에 갈 일이 많았는데, 갈때마다 한개, 두개씩 사모은게 벌써 이만큼이나 됐다. 이번 여행에서도 이 사진 오른쪽 끄트머리에 보이는 헬로키티 베어브릭을 건졌다. 



이건 베어브릭 사려고 간 후쿠오카 만다라케 매장에서 본 '저수지의 개들' 피규어. 비행기표를 싸구려로 끊어서 수화물 맡기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더라면 사올 뻔 했다. 근데 스스로 좀 웃기다고 생각한게, 이걸 보자마자 아니 이걸 누가 산다고 만들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아 내가 갖고 싶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간 모순충이 아닌가 했다. 근데 저수지의 개들 재밌는 영화 아닙니까. 타란티노 날것 개짱.


이것 저것 쇼핑 좀 하고, 정신을 차리니 숙소에 체크인 할 시간이 되어 들어갔다. 숙소야 생긴지 얼마 안됐지만 워낙 유명해서 굳이 사진은 찍지 않았다. 궁금하신 분은 초록 검색창에 WBF 하카타 텐진이라고 치면 수많은 블로거들의 후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조식부터 스테이크를 주는 걸로 유명하다는데 나는 이런 저런 사정상 먹지 않았다. 아무튼 숙소에 들어가니 전날 거의 잠을 자지 않은 여파인지 잠이 쏟아져서, 네시부터 일곱시 언저리까지 꿀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 배가 고파져 숙소 인근 동네 우동집에서 니꾸우동을 한그릇 시켰다. 한 육백엔 쯤 했던 것 같다. 꽤 큰 가게에 식사시간이였는데 손님은 나뿐이었다. 주문을 받은 사장님은 묵묵히 하지만 정성껏 천천히 우동을 만들었다. 솥은 끓어 오르고, 꽤 오래된 듯 목조로 된 가게 내부에는 정적을 깨는 TV 소리만 메아리쳤다. 갑자기 다음날 한국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했지? 여행 3일째인데 딱히 뭔가 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뭘 하러 왔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왔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아까 저수지의 개들 피규어를 보면서 했던 생각이 다시 고개를 쳐든다. 나는 정말 모순 덩어리구나. 저걸 누가 사? 에서 내가 사고싶다로 넘어가는데까지 걸린 시간 10여초. 아무 것도 안하러 여행 가야지, 가서 푹 쉬어야지 하고 막상 별로 한게 없다고 느껴지니 허탈하다고 느껴지는데 걸린 시간 3일. 


물론 금방 아무렴 어때라고 생각했지만.




우동집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주인장이 한글로 긴 편지같은 글을 가게 창문에 적어놓은 술집을 발견한다. 저희 집은 여러 분이 심야식당에서 본 가게와 비슷한 곳입니다. 혼자 가게를 관리하느라 음식이 나가는 것은 느리지만 정성껏 하겠습니다. 원래 한글이 많은 가게는 왠지 접객이 뻔할 것 같아 잘 안들어가는데, 저렇게 정성껏 뭔가를 써서 붙여놓을 정도면 알아서 잘 해주겠거니, 어쩌면 말이 잘 통해서 편하기도 하겠다 라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사실 딸리는 일본어로 3일 내내 말한 것도 약간 스트레스였고. 작은 술집의 이름은 '키키'였다. 사장님은 영어에 매우 능통했다. 윗 사진은 일본에서 이 가게에서만 마실 수 있다는 스파클링 사케. 달지 않아서 괜찮았다. 물론 나는 한국에서는 소주를 싫어하지만 일본 소주는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이어 일본 소주를 마셨지만.



(실내는 이런 분위기)


적절히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 농담도 하고, 사는 이야기도 하면서 온더락 소주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는데, 한국에서 온 모녀가 가게에 들어왔다. 솔직히 귀찮기도 해서 그냥 한국 사람 아닌 척 하고 술을 마시려는데 가게 사장님도 오 한국 사람이다 너가 나좀 도와줘 하시고, 이 손님들도 사장님이랑 커뮤니케이션이 썩 원활하지 않아서 이 집은 명란 튀김이랑 닭 튀김이 맛있대요. 저는 닭튀김 먹었는데 먹을만 해요. 라고 말을 했더니 모녀중 어머님이 어머 한국 분이시네요, 왜 아닌척 그러고 계셨어요 라고 하신다. 어...저는 아닌 척 하는게 어떻게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웃었다. 애석하게도 두 모녀가 다 술을 못드신다길래 적당히 안주랑 탄산음료를 드시고 가도록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어디랬더라, 용인에서 오셨대나.



한국에서 온 모녀도 한참 있다 떠나고, 나는 사장님께 배는 부른데 간단히 소주랑 먹을 만한 안주를 요청하니 계절 한정 메뉴라면서 봄철에만 피는 어린 순으로만든 나물 된장 무침을 먹었다. 상당히 맛있어서 무슨 풀인지 써달라고 해서 구글링 했는데, 아무래도 한국에는 없는 종인 것 같다. 영어로는 horsetail이라고 표기하는듯. 너무 오래 죽치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것 까지 먹고 일어섰다.


(어째서 락스탁일까. 락스탁 앤 스모킹 배럴즈??)




마지막 밤이 아쉬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닭껍질 꼬치랑 츠쿠네(고기경단) 꼬치를 먹으러 갔다. 첫잔은 맥주, 둘째 잔은 희한하게 짐빔 하이볼을 맥주보다 싸게 팔길래 하이볼로 마셨다. 낮잠을 잤지만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아 그러고보니까 숙소 체크인 하기 전에 점심에 스시먹으러 갔는데 그 얘긴 빼먹었네. 동네 할아버지들이 한국에서 왔다니까 소주도 사주셨는데. 잘마셨습니다 할아부지들.



여행기 (4 - 마지막)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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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루메-후쿠오카 여행기(2)


첫날은 여관에서 훌륭한 저녁식사에 곁들여 하이볼을 홀짝인 뒤 쿠루메 시내로 나가 칵테일을 마시면서 사장님, 스텝, 단골 커플 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안되는 일본어로 나누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놀라워 한건 도대체 왜 쿠루메로 놀러왔냐는 거였다. 여긴 아무 것도 없어요, 라고 바 사장님이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안하러 왔어요. 인생에서 아무 것도 안하는 건 정말 어렵던데요. 그러자 바에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말이 서툰 외국인에 대한 친절인지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어렵지. 아무 것도 안하는 건 정말 어려워. 꽤나 오래 이야기를 나눠서 엔간하면 사진이라도 찍었을 텐데 왠지 아무 것도 안하러 와서 기념사진을 남기긴 쑥스러워 사진은 남기지 않았다. 그래도 캄파리 소다는 맛있었어요 마스터. 이 글은 못보겠지만.





비행이 짧아도 비행은 비행인지라 피곤하기도 하고, 술도 꽤 마셔서 잠을 잘 자고 일어났다. 내가 여관에 체크인 한게 일곱시쯤. 저녁식사를 하고 목욕까지 하고 바로 나선게 여덟시 반쯤. 다시 여관으로 돌아온게 열두시쯤. 평상시에는 수면 패턴이 훨씬 밀려있지만 피곤이 몰려와 거의 바로 잠들어 일곱시 반쯤 깼다. 전날 프론트에 여덟시 반쯤 아침을 차려달라고 얘기해놔서 이리저리 다다미 방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식당에 내려가니 여관 할머님이 밥을 차려주셨다. 전날만큼 화려한 구성은 아니지만, 정갈하고, 아침의 까끌거리는 입 안을 헹궈줄 된장국도 있고, 샐러드며 연어 구이 등등 입맛 돋구는 반찬이 많았다. 나 미닛메이드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오렌지 주스도 주셨다. 전날은 몰랐는데 밥은 식탁 위에 전기 밥솥을 올려주시면서 모자라면 얼마든지 드시란다. 예,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같은 게 있다면 아마 이 집의 밥일겁니다.



원체 관광지라는 것 자체가 많지 않은 쿠루메지만(사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그다지 큰 볼거리가 아니더라도 홍보물을 훨씬 잘해놓는 경향이 있는데, 쿠루메는 그마저 얼마 없더라. 아,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아름다운 도시..) 그래도 이런 저런 팜플렛에 60미터가 넘는 관음보살이 있다고 해서 관광객으로서의 본분을 조금이나마 지켜보고자 열두시쯤 여관을 나섰다. 빗줄기가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는데 일기예보에서도 잠깐 스쳐간다고 하고, 우산을 사는게 돈도 돈이지만 여행객은 짐이 늘어 불편하니 영 꺼려졌다. 사진은 저 멀리 보이는 관음보살이다. 주변 차량 크기랑 비교해보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다. (지금 웹 검색을 해보니 풀 네임은 '구세자모대관음보살', 혹시 놀러가실 분이 있다면 JR 쿠루메 역에서 버스로 15분 정도 걸린다. 가까움.) 사진에서도 드러나지만 이때쯤 비가 꽤 내리기 시작해서 나는 온통 젖어버렸는데, 이게 사람 심리가 묘한게 꽤 젖어버리니까 또 우산 사기가 싫더라. 기왕 젖은거 뭐.. 싶어서.


가까이서 보면 더 거대하다. 그런데 입구에서 입장권(500엔)을 구매하는데 직원분이 관음보살님의 뒤에 ~~~~가 있습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그게 뭔지는 일본어가 짧아서 잘 못들었는데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건지 가보면 되겠지라고 가보았더니...



이 사진은 놀랍게도 관음보살님의 몸통 안이다. 그니까 저 관음보살이 계단을 빙글빙글 올라가는 일종의 전망대 같은 거였다. 관음보살의 뒷편에는 이 계단 통로의 입구가 있었다. 끝까지 아픈 다리를 이끌고 올라가면..




이런 뷰를 볼 수 있다. 다소 비싸다고 생각했던 입장권이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놀랍게도 도로 내려오자 지하로 이루어진 시설이 있었고, 그 곳에는 불교 전통의 극락과 지옥을 묘사해놓은 박물관과 시설이 있었다. 특히 이 지옥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사진 촬영 하지 말라고 써있어서 딱 한장만 찍었다. 기억에 남기려고)


일단 처음에 들어가면 손을 얹는 틀이 있다. 그곳에 손을 얹으면 염라대왕님이 너는 무슨무슨 지옥에 가야 한다고 선언함. 그리고 뒤를 지나가면 온갖 지옥들에 대한 묘사가 되어있는데, 이게 불이 꺼져있다가 사람이 들어가면 센서가 인식되서 팟 하고 불이 켜지면서 저 인형들이 움직인다. 혼자 갑자기 이런걸 보니 좀 무섭기도 했다. 그리고 지옥 코스가 끝나면 다시 손을 얹는 틀이 나오고 어느 동물로 환생할지가 나온다.

나는 고양이였다. 비를 맞아서 길고양이같았나. 아무튼 아래 코스까지 다 보고 나니 500엔이면 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바람을 맞고 돌아다녔더니 뜨끈한 국물 생각이 나서 구글에서 꽤 평점이 좋은 라멘집을 찾아 걸어갔다. 버스도 있긴 있었는데 시골이라 그렇게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이날 이래저래 걸어다니니 10km 정도는 걸은 것 같다. 참고로 쿠루메가 유명한 몇개 안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돈코츠라멘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꼭 쿠루메가 아니더라도 도쿄를 비롯한 관동의 라면과 비교했을때 훨씬 맛이 낫기에 규슈에서는 라면을 많이 권한다고들 한다. 내 입에도 그랬다. 물론 한국 사람 입맛에는 대체로 짜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소로 향하는 길. 저 멀리서 비가 그쳐오고 있었다. 평범한 주택가 풍경이지만 날이 개는 모습과 너른 풀밭에서 왠지 모를 노스텔지어가 느껴졌다. 유년기를 아파트촌이 아닌 주택가에서 보내서 그런지 이런 낮은 주택들이 연이어 들어찬 풍경 쪽이 훨씬 더 사람 사는 느낌이다. 하루종일 비를 맞다가 날이 개는 것을 목도하면서 잘 풀리지 않았던 최근 몇년도 이렇게 개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매일 비가 오진 않겠지.





다시 숙소로. 욕탕이 갖춰저 있는데 손님도 별로 없으니 늘 개인탕을 쓰는 기분이 들었다. 목욕 후 식사를 하려 내려오니 오늘도 진수 성찬이다. 전골 정식인데, 전날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그렇고 개인 화로를 주는건 참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배부르게 먹고 또 술한잔 하러 시내로 나가려다가 숙소 앞 24시간 대형 마트에서 간단한 안주랑 캔맥주 몇 개를 챙겨 들어와서 천천히 마셨다.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목욕까지 했는데도 잠이 잘 오지 않아 간신히 서너시간쯤을 잤다. 딱히 어떤 생각에 꽃힌 것도, 무언가에 크게 몰두 한 것도 아닌데 이리저리 핸드폰을 하다 한국의 일들을 생각하다가 거의 밤을 새버렸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서 온 여행인데 여전히 한국의 일들을 머리에서 비우지 못하는게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도 숙소에 있던 동전 세탁기에 비 맞은 빨래 돌렸던 것을 밤새 온풍기에 이리저리 뒤집어 줬더니 깔끔히 말라있었다. 


쿠루메-후쿠오카 여행기(3)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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