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박과장 2018. 5. 27. 12:5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국가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내용의 영화를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 연구자들도 그렇지만, 영화 감독들도 이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보통 둘 중 한가지 방법을 사용하는데요. 거대한 흐름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러한 흐름을 직접 만들어낸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다시 말해 거대담론의 형성과정을 보여주거나, 나머지 한 방법은 시대 앞의 개인의 여정을 마치 롱테이크 촬영을 하듯 잡아내서 그 의미를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로 확장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죠. 전자의 경우는 최근의 한국 영화 <1984>,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이 있겠고, 후자의 경우는 이 리뷰에서 다루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의 대표작인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이창동의 <박하사탕>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또한 후자의 이야기입니다.


런닝 타임이 4시간에 달하는 (3시간 57분) 긴 영화이기 때문에 줄거리를 요약적으로 서술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큰 줄기를 나누어보자면, 일단 시기는 대만 계엄령 시기이고(한국의 군부 독재 계엄령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 때의 방황하는 14살 소년인 샤오쓰와 학생이지만 조폭에 가까운 집단인 '소공원파', '217파'의 대립 속에서의 학생들의 이야기가 하나겠고, 나머지 하나는 계엄령이라는 시대 속에서 여러 풍파를 맞아가고 이겨내가는 샤오쓰의 가족 이야기 일 것입니다. 


사실 학생들이 조직적 폭력집단을 만든 것 조차도 시대와 무관하다 할 수 없습니다. 한국도 7-80년대의 군부 독재를 떠올려보면, '폭력의 일상화'라는 키워드가 등장합니다. 젊은이들의 주먹질 정도는 범죄가 아닌 삶의 일부로 인정하는 사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법보다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인 사회인 것이고, 이를 강화하는 것은 폭력을 전시하는 국가인 것이지요.


 

그러나 지식인 출신에다가, 대만 출신도 아니고 중국 본토(상해)에서 혁명을 피해 급하게 이주해온 샤오쓰의 아버지는 이런 사회와 불화 관계에 있습니다. 대만에선 이런 1940년대 이후 외부 출신을 외성인, 원래 그에 앞서서 이주했던 사람들을 본성인이라고 지칭한다더군요. 그에게는 자존심을 구겨가면서 옛 친구에게 승진을 구걸하는 것이나, 과거에 어울렸던 친구가 혁명 분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가짜 진술서를 써야하는 것이나,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국가의 가장이지만 가족들 앞에서 새벽녘에 뛰어나가 엉엉 우는 모습을 보이는 장면에서 그의 이런 시대와의 불화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합니다.


'밍'이라는 여자 주인공 캐릭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밍을 만나는 남자들은 모두 밍에게 반하게 되고, 영화감독은 첫눈에 캐스팅을 하려고 하지요. (참고로 유머 감각이 많지 않은 이 영화에서 영화감독이 성을 내며 '이래가지고 영화가 되겠냐, 이딴걸 왜 찍냐'고 말하는 부분은 감독이 자기 자신에게 건내는 농담같은 거의 유일한 장면입니다.) 밍을 차지하기 위해 두 파의 리더들은 한쪽이 목숨을 잃는 싸움을 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밍은 수동적 대상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을 두고 목숨을 걸고 싸우건 아니건 자신이 좋아하는 샤오쓰와 만남을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결말은 마음이 변한 것으로 보이는(이 부분이 영화에 100% 확실하게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샤오쓰의 친구 집에 있는 밍을 샤오쓰가 보게 되죠) 밍을 샤오쓰가 칼로 살해하는 것이지만요. 왜 샤오쓰는 밍을 죽였을까요? 그에 대해 한 마디로 단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질투 때문일 수도, 자신의 삶에 대한 혐오 일수도, 임계점을 넘으면 폭발하는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서일 수도, 폭력이 늘상 상존하는 시대 때문일 수도 있지요.


영화 내내 전구나 형광등이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두운 방에서 깜빡이는 전구 때문에 그 모습이 흐려지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샤오쓰의 학교에서 아버지가 분노를 폭발하는 장면에서는 아버지가 직접 형광등을 깨버리죠. 또한 소공원파가 217파를 습격하는 장면에서는 일부러 전기를 내려서 어둠 속에서 일을 처리하는데요, 이러한 조명 처리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지가 명백히 보이지 않습니다. 실은 그 존재가 중요한 것이지,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시대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한 고발이자 묘사같습니다.



연기에 대해서는, 일단 아역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러운 연기는 기대할 수 없겠습니다만, 장첸은 훗날 대배우가 될만한 좋은 재목임을 잘 보여줍니다. 대사처리에 대해선 제가 중국어에 조예가 없어서(아니 그런데, 어떤 언어에 대한 선입견이란건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래서 대사를 자연스럽게 하는지 안하는지를 외국어 영화에 대해 말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 싶어요)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미 배우이던 아버지와 형과 함께 출연해서 더 자연스러웠는지는 몰라도 나이에 맞지 않는 표정들을 보여줍니다.


'밍' 역할을 한 양정이의 경우는 이후로 그닥 하고싶지 않았는지 한편도 영화를 하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하네요. 



OST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Are you lonesome tonight?'은 영화 내용 상에도 등장하고, 이 영화의 영어제목인 'A Brighter Summer Day'를 가사로 갖고 있습니다. 두 소년 소녀의 여름날 장면 이 제목에 맞게 정말 아름답게 촬영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리뷰에서 늘 걸작으로 불리우고,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 다만 정말 보기가 어려운 영화였는데, 디지털 리마스터링 기념으로 2017년 11월에 개봉해준 덕분에 저도 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4시간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posted by 박과장 2018. 5. 24. 11:32

[주의 :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버닝>은 종수와 해미, 그리고 벤 세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소설을 쓰려고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고 있고, 해미는 카드빚에 쫒기면서 후암동 좁은 원룸과 나레이터 모델 현장 사이를 오가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으로 보이는 그 둘은 우연히 재회하고, 해미는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을 다녀오면서 해미는 의문 투성이의 남성인 ‘벤’과 함께 귀국하게 되죠. 그는 종수의 표현을 빌리면 ‘개츠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젊은 나이에 아주 많은 돈을 갖고 재미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셋은 술자리를 함께하기도 하고, 벤의 친구들의 모임에 같이 가기도 하고, 종수의 파주 시골집에서 함께 대마초를 나눠피기도 하고, 기묘한 조합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해미가 사라지고, 종수는 벤을 의심하며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버닝>의 외표는 서스펜스 스릴러이지만, 실은 이 영화는 제 관점에서는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신자유주의(벤)의 인간 파괴와, 이를 간파하더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과(종수) 혹은 간파하지 못해서 타버리게 되는(해미) 구조의 문제를 지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벤의 삶은 화려합니다. 그는 항상 종수에게 당신은 너무 진지하다고 충고하면서, 좀 더 가볍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극의 초반부터 해미의 입을 빌려 등장하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가 각각 벤과 종수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허기, 즉 본능과 재미만을 쫒는 리틀 헝거와 존재론적, 본질적 허기를 달래고자 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대립인 것이죠. 그러나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부시맨의 사회에서는 그레이트 헝거를 추구하고 높게 평가하더라도, 자본주의가 상륙한 이후에는 그레이트 헝거는 별 가치가 없어집니다. ‘글을 잘 써서’ 칭찬받은 문창과 졸업생인 종수의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가 실제로는 실형을 막지 못한다는 점이나, 대학을 나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택배를 비롯한 막일 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재미있는 점은, 벤은 이 사실-본인의 욕구 추구가 어쩌면 더 낮은 차원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수가 좋아하는 포크너의 소설을 사서 읽어보려고도 하고, 마지막 결말에서 종수의 일격 이후에 오히려 종수를 공격하기 보다는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한 자세를 취하죠. 벤이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힌트는 이외에도 더 많은데요, 예컨대 해미를 사라지게 만든 행위를 비닐하우스 태우는 일에 빗대어 말할때, 쓸모 없는 비닐 하우스가 참 많고, 없어져도 한국 경찰들은 관심도 없다고 말하죠. ‘그레이트 헝거’인 종수가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떻게 구분하는가’라고 질문하자, 그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동시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요. '나는 반포에도, 파주에도 있다'는 선언은, 스스로가 인격체라기 보단 상징임을 의미하죠.


<버닝>이 단순한 장르물이 아닌 자본주의와 인간성의 관계에 집착하는 점을 보여주는 몇가지 단서들을 모아보죠. 먼저, 벤을 추격하던 종수가 미술관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벤을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종수가 그 장면에서 바라보게 되는 미술관의 작품은 다름 아닌 용산 참사를 다룬 것으로 보입니다. 용산 참사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재산권 분쟁으로 경찰 진압과정에서 여러 명이 사망한 사건인데, 사망의 원인이 바로 화재였죠. 영화 제목은 <버닝>, 용산참사가 그려진 작품 바로 건너편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벤과 가족들. 이 정도면 매우 직접적인 상징이죠. 게다가 해미의 집은 참사가 일어난 바로 근처인 후암동인데, 후암동이라는 지명을 자꾸 화면에 노출시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종수와 해미의 고향으로 제시된 파주라는 공간입니다. 끊임없이 북한의 선전방송이 나오죠. 그러나 그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예컨대 종수와 해미가 과거에는 자본주의로부터 침략당하지 않아서 행복하게 지냈던 공간이지만, 이미 이제는 점령되었고(벤이 굳이 파주까지 올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이를 경고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북한에서는 끊임없이 방송이 나오지만, 실은 그쪽 조차도 제대로 된 해결방법은 아니며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습니다. 


이 외에도 예술가로서의 종수의 성장, 최승호 MBC사장이 분한 종수 아버지와 종수의 관계(최승호 사장이 이창동 감독의 경북고 후배라나요) 등 아직 리뷰에서도 풀어낼 떡밥이 아주 많지만, 이에 대해서는 2회차 관람 이후에 더 자세히 적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기에 대해서는 전종서의 연기에 대한 코멘트가 많던데, 대체로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많더군요. 그런데 저는 이게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봅니다. 일전에도 리뷰에 적었던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의 조금은 비현실적인 톤이 사랑의 비극을 더욱 강조해주듯이, 어쩐지 붕 떠있는듯한 전종서의 연기톤은 안정되지 못한 캐릭터의 내면을 더욱 강조해주는 효과를 지닙니다. 이창동은 테이크를 아주 많이가서 ‘변태 감독’이라는 말까지 듣는데, 이걸 통제에 실패했다고는 전혀 보이지 않아요. 



유아인은 본인을 확실한 주연급 배우로 자리잡게 해주는 역할을 드디어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굳이 이 글에선 그의 개인사를 둘러싼 논란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요, 지금껏 흥행에 성공한 주연작들은 많았지만 대부분 다른 강력한 주연배우들과 함께였고 그들의 연기가 더 빛났던 영화였습니다. 예컨대 <사도>는 송강호와 함께, <베테랑>은 황정민과 함께 주연을 맡았으니까요. 스티븐 연은, 한국어 연기임에도 불구하고(물론 교포 역할이지만) 자기가 해야할 것을 정확히 아는 배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색한 한국어가 웃길 수도 있는데, 서늘한 느낌을 주는게 비언어적인 통제가 잘 되어있는 프로페셔널로서의 강점이 잘 보이더군요.


서스펜스라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적 재미와, 넘치게 많은 상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영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청춘’을 다루었다는 이창동 감독의 언급은 약간 블랙 코미디로 느껴질 정도로, 이 영화에서 불타고 있는건 젊은이들 뿐만은 아닙니다. 감옥에 있는 종수의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종수의 어머니에게도 500만원의 빚을 받으러 찾아오는 검은 옷을 입은 존재가 있지요. 아마 어머니에겐 그 존재가 ‘벤’이 아닐까요.


<이 리뷰는 2회차 관람 이후 수정할 예정입니다.>


posted by 박과장 2015. 5. 19. 14:00

 아주 답답합니다. <트라이브>를 보기 시작한 후 처음 10분 정도의 심리 상태입니다. 왜냐구요? 이 영화는 청각장애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모든 의사소통이 수화로 이루어지는데,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자막 한 줄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영화 맨 처음 앞으로 자막이 없을 것이라는 자막은 나옵니다만.) 게다가 일반적인 잡음을 제외하곤 영화 음악도 없어요. 하지만 10분 여를 견뎌내면, 화면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얼개를 이해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 특별한 영화적 '체험'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에게 영화속 대사는 엄청난-혹은 엄청나다고 믿어온-것이었습니다. '드루와' 가 없는 <신세계>,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 아니, 이게 아니고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는 대사가 없는 <부당거래>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영화의 주제의식을 한번에 정리해주기도 하고, 관객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하는 것이 대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사가 없이(정확히는 수화가 오고가지만, 그것도 우크라이나 수화이니 우리나라 관객들에겐 없다고 보는게 맞지요.) 관객들은 대부분 같은 이야기를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물론 약간의 해석 차이는 있지만, 그건 대사가 있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렇다면 영화에서 대사는 정말로 엄청난 것일까요?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에서 소리나는 말이라는 것이 그렇데 대단한 것일까요?  <트라이브>는 단순한 영화적 경험을 넘어 이러한 성찰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화 스스로의 스토리를 배제하고라도 말이에요. 순전히 이러한 양식만으로 볼 가치가 충분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고, 청각 장애가 있는 학생들만 다니는 기숙 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학교는 사실 마피아 조직이나 다름없습니다. 학교 선생들부터 가장 어린 학생까지 앵벌이, 매춘, 강도, 절도 등 온갖 범죄를 조직적으로 운용하고 있어요. 이 조직에서 꽤 상층부에 편입되어 신임을 쌓아가던 주인공은 매춘부로도 일하는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고, 일을 방해하다 집단 내에서 말단 앵벌이의 위치로 추락합니다. 결국 사랑을 좌절당한 분노로 몇 명의 상층부를 모두 살해하고는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상당히 흔한 이야기입니다. 누아르 장르의 꽤 익숙한 이야기죠. 잘 나가던 조직원이 사랑때문에 조직에 배신 혹은 해를 끼치고, 제거되거나,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조직에 맞서서 싸우게 된다는 이야기는 한국 누아르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만큼(<달콤한 인생>, <차이나타운> 같은 영화들요) 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트라이브> 가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점이라면 그 배경이 엄연한 '학교' 이고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이것이 실제로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형식적 특징 말고도 사회고발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양식적 특징을 넘어 영화라는 장치로서의 특징을 몇가지 살펴보죠. 감독은 영화의 특성상 모든 배우가 비전문, 그것도 실제로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들을 캐스팅했습니다. 총 1년의 시간동안 SNS를 통해 캐스팅을 작업했다고 하네요. 사실 엄청난 성공이라고 봅니다. 어떤 전문 배우도 이런 연기는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 하나의 감각이 좌절되어 있는 묘한 광기를 대단하게 표현합니다.


 편집과 카메라 움직임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원래 대사에 흐름에 맞춰 카메라가 움직이는게 일반적인 촬영의 기법이라면, 이들은 사실상 '온몸으로' 말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풀샷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또한 원래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관조적인 시선으로 느껴져서 사회비판적 분위기를 더욱 강화시켜 줍니다.




한줄평 : 우리가 지금까지 들었던 말소리들은 다 뭐란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