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박과장 2012. 5. 1. 00:11

  

 <건축학개론>의 리뷰를 통해 이미 이 블로그에서는 성숙하지 못하지만 착한 남자가 어떻게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 상처받았다고 믿게 되는지 이야기 했었습니다. 넵. 남자가 나쁜겁니다.

 오늘 이야기 할 영화는 건축학 개론의 이제훈보다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역이지만 사실 하는 짓은 크게 다르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500일의 썸머. 여자주인공의 이름이 '썸머'인지라 500일의 그 여자의 기억 혹은 500일의 여름날 요렇게 중의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군요.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하는 일을 기억하는건 계절에 대한 기억처럼 선명하지만 왜곡된 이미지를 같게 되니까요.

 우리의 주인공 톰(조셉 고든 레빗)은 우리가 어디서 많이 본 스타일입니다. 적당한 자기애와 자기비하가 있으면서 팝 컬쳐보다는 좀 된 노래를 좋아하고, 겉치레보다는 실속있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사실 화려한 것에 대한 동경도 좀 있구요. 여자 좋아하고. 주변 친구들은 좀 더 심각한 케이스죠. 마지막 연애가 초등학교때라거나. (근데 옷은 못입는 듯 너무 잘입어서 좀 언밸런스 하긴 합니다. 이런 형들 TPO에 맞게 옷입는거 본적 없는데..)

  헌데 이 남자, 귀여운 구석이 있는게 아직도 진짜 사랑을 믿는답니다. 사실 요새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멋있는 사랑의 기준은 쿨함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데 얼마나 시대착오적 생각입니까. 게다가 백마왕자에 대한 환상 비슷한 것이 있어서 언젠가 본인에게 꼭 맞는 사람이 자기 손을 잡아줄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 '썸머'는 자신이 예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예쁜 여자입니다. 이런 경우 자의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커지는데, 말하자면 스스로를 많이 사랑하게 되는데 그 대부분의 이유가 외모에 있는거죠. 그러다보니 공허한 내면을 채우기 위해 맘에 들지도 않는 책을 읽는다거나 음악을 좋아한다고 우기는 '교양 속물'이 됩니다. 영어로는 힙스터라고 하던데.

 톰은 직장동료인 썸머를 만나서 호감을 느끼죠. 이쁜 여자니까. 게다가 썸머는 자신이 듣는 스미스를 좋아한답니다. 세상에 스미스를 좋아하는 젊고 예쁜 여자라니. 그전까지는 그림의 떡보듯 썸머를 보았었지만 이제 톰은 썸머가 운명이 아닐까 고민합니다. 저 여자가 내 전부/운명이 되어주진 않을까. 그리고 의외로 이건 짝사랑은 아닙니다. 썸머도 톰에게 호감을 느꼈거든요. 사실 그녀가 이성을 좀 쉽게 만나는 성격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둘은 잘 되고 연인같은 관계가 됩니다. 왜 연인 '같은' 이라는 표현을 썼냐면 썸머는 사랑같은 건 믿지 않거든요. lover라는 호칭을 쓰질 못하는 거죠, 본인이. 점점 더 진지해지는 톰과 관계안에 갇힐까봐 두려워하는 썸머. 결국 관계는 파국을 맞게 되고 톰은 반폐인이 되어 직장마저 관두게 되지요. 여기서 질문, 썸머가 나쁜 년이어서 톰을 버린걸까요? 아니면 톰이 멍청해서 그런걸까요?

 여하간 이후 둘은 다시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초대받아서 같이 다시 커플처럼 신나게 놀고 오지만 톰의 바람/예상과는 달리 썸머는 그냥 그를 흘러간 친구 하나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장도 관두고 인생의 끝에 몰린 것 같은 그지만 다시 전공했던 건축에 열의를 불태우며 결국 새로운 직장에 면접을 보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거기서 같이 면접을 본 다른 지원자 아가씨랑 잘될 것 같은 암시와 함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관계의 몇몇 진실은 이미 영화 '행복'의 리뷰를 통해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두루미와 여우의 이솝 우화를 생각하시면 되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접시에 담아 내놓으면 두루미는 먹기가 힘들지요. 관계라는 것이 그런 면이 있습니다. 톰의 입장에서 보면 썸머는 너무 차가운데다가 미래에 대한 생각도 전혀 없으며 자신을 진지하게 관계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 듯 합니다. 반면 썸머의 입장에서 톰은 그저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행위만 하고 있는거죠. 내적으로 불안정한 썸머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관계에 대한 생각만 계속 관철시키려고 하다보니 자연스레 맘에 떠나게 되는겁니다.

  외국 영화의 리뷰를 할때마다 항상 연기에 대한 평가가 가장 조심스럽고 어렵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대사의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하는데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표정과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는건 연기에 대해 채 반절도 말 못하는거죠. 그렇지만 이야기하자면,

 조셉 고든 래빗은 아역배우 출신이지만 전 그의 어린시절을 지켜보지 못했으니 어떤 이미지로서 받아들여지진 않아요. 다만 최근에 큰 작품들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500일의 썸머는 그의 시발점같은 작품이죠. 자연스러워요. 술먹는 장면이 많은 영화인데 술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 썩 괜찮은 연기라고 보여집니다. 감독이 실제로 술을 먹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의 헐랭한 모습을 보고 인셉션에서 무게를 잡아서 좀 충격받은 사람도 있다더군요.

 주이 디샤넬에겐 본인의 가장 예쁜 시절을 기록할 영화일겁니다. 최근에 드라마 new girl에서 나오는 모습보다 이때가 천배쯤 예쁩니다. 주인공이 예쁜게 강조가 되야 하는 영화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연기는 그럭저럭.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스스로 좀 고민하는 느낌.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예쁘고 귀여운건 톰의 어린 동생 역할로 나온 클로이 모레츠입니다. 지금에야 많이 커서 탑 배우중 하나가 되었지만 이때만 해도 킥애스보다 전인걸요. 인생 다 산 표정으로(실제로 오빠보다 훨씬 현명합니다) 톰을 위로하면서 때론 나무라는 장면은 정말 귀엽습니다.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를 해석하는 방식과 현학적 접근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이건 감독과 작가의 재능이지요. 특히 시간 배열을 그녀와 만난지 몇일째, 라고 보여주는 방식이나 시점이 달라지는 방식들은 꽤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다만 썸머를 이겨내고 새 여자를 만나는 과정을 굳이 톰이 꿈을 이뤄내는 과정과 함께했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만 놓고서는 톰은 독립적 자세를 이룰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한계짓는 것 같아서. 젊은 감독이 (사실상) 첫 영화를 잘 찍긴 했습니다만, 장치도 좀 과하게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구요. 뮤지컬같은 시도가 재미없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좀 뻔한 장르적 클리쉐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오프닝이 아주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작가 본인의 소재가 영화의 75%라고 하던데, 이런 자막이 나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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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NOTE: The following is a work of fiction. Any resemblance to any persons living or dead is purely coincid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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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ecially you Jenny Beck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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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tch.

(번역)

작가의 말 : 이어질 이야기는 모두 허구입니다. 혹시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죽었건, 살았건)이 있더라도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특히 너 제니 벡맨.


썅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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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첫째는 타이밍이요, 둘째는 진심이로다. 쉬운듯 어려운 사랑.

★★

posted by 박과장 2012. 4. 27. 03:56

 

 젊은 감독, 윤종빈은 한국 사회의 남자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그 마초적인 권력 관계와, 가부장제, 멋있는 척은 졸라 하지만 알고보면 종잇장처럼 얇은 신념이라던가, 세상에 적당히 맞춰 살아가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자세 같은것들이요. 섹스에 환장하는 수컷들의 모습에 집착하는 홍상수랑은 조금 다른 지점이겠습니다.


 특히 첫 장편 연출작 '용서받지 못한 자'의 내무반 구성은 계급으로 나눠진 남자들이 원래 다 그렇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종류의 폭력을 자행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결국 이를 부조리하다 여기다가 물들게 되고 그런 자신이 얼마나 위험해졌는지 자각한 주인공은 목숨을 끊고 말지요.


 다음 작품인 '비스티 보이즈'는 호스트바가 무대입니다. '공사'가 난무하는 이 바닥에서 가장 비중있고 희화화된 인물은 하정우가 맡은 '재현'입니다. 여자들한테 돈뜯어내기 바쁜 이 사람은 그래도 BMW를 타고 다니면서 온갖 멋있는 폼은 다 잡고 다니지만, 결국 그냥 딱 고만한 속물에 불과합니다. 빚쟁이한테 쫒겨서 여자 앞에서 망신이나 당하고. 결국 조금이나마 순수함이 남아있던 윤계상은 피를 보고, 뻔뻔한 하정우는 살아남아서 일본까지 건너가 또 호스트바 일을 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리고 다음 작품으로 윤종빈 감독이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감독한다고 발표하고 시놉시스를 읽었을때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마초권력이 가장 뿌리깊게 영향력을 발휘했던 시대이면서, 나라의 가장 큰 틀인 정치도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마초적으로 돌아갔지요. 그러니 마초들을 현실적이지만 우스꽝스럽게 그려내는 윤종빈이 아마 가장 하고싶었던 장르일겁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비리 세관원이던 최민식은 비리가 걸려서 직장을 관둬야 하는 상황인데, 이 와중에 밀수하려던 많은 양의 히로뽕을 발견하고, 관두는 김에 이걸 유통시켜서 한몫 잡아보려고 합니다. 부산에서 제일 잘나가는 조폭 하정우의 손을 잡고 같이 일을 하게 되지요. 이 과정이 재미있는데, 처음에는 하정우의 주먹이 무서워서 빌빌 기던 최민식이 같은 종씨의 집안 사람이란걸 알고(그것도 한참 아랫 사람이지요) 갑자기 반말을 내뱉다가 한대 얻어맞죠. 그 다음 장면은 집에 들어온 하정우가 최민식 앞에서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는 모습입니다. 평생 일면식도 없던 사람에게 집안 어른이라고 갑자기 절을 해야 되는 세상, 위아래 나누기 좋아하는 딱 야만적인 그때 모습이지요.

 

 이후로 둘은 같이 일을 해나가면서 로비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최민식은 정치권에 온갖 줄을 대가면서 하정우와 함께 사업을 키워나갑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누구 눈에 잘보여야 되는지만 알면 일은 만사 형통입니다. 그냥 평범한 가장이었던 최민식은 하정우의 비호 아래에 반쯤 조폭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진행이 됩니다. 


 헌데 이권을 다투는 남자들, 게다가 자존심이 센 하정우가 최민식에게 계속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있고 싶지도 않고. 결국 둘의 사이는 멀어지고 최민식은 하정우의 반대편에 서있던 다른 조폭과 손을 잡기도 하구요. 그리고 영화 제목이기도 한 '범죄와의 전쟁'이 결국 벌어젔을때 본인을 수사하러 온 검사와 손을 잡게 되면서 하정우를 팔아넘기고 마지막에 살아남는건 최민식이죠. 윤종빈의 모든 작품에서 순진한 사람은 얼마나 강한 척을 하고 열심히 살던 도태되거나 목숨을 잃습니다. 적당히 세상에 맞춰주는 주인공들이 성공하거나 잘 살아가요. 이건 살아남는게 강한 거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를 한층 더 강조하는 도구입니다.


 스토리 라인이 많이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캐릭터를 살리는데 주력한 시나리오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통제가 덜해요. 캐릭터들이 살아서 나돌아다니도록 감독이 부추기는 느낌이고, 특히 최민식은 극의 중심으로서 모든 인물과 탁구를 치듯이 주고받는 리듬을 갖게 되는데 역시 대단한 배우인만큼 일관되게 안정감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불안감을 주지 않는 연기가 좋은 연기지요. 하정우는 이름값에 비해서 좀 작은 역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건 '밀양'의 송강호랑 비슷한 겁니다. 내가 못해서가 아니고 주인공이 중요한 극이기 때문에 잘 받쳐주는데 중점이 가 있는 연기지요.

 

 조연들의 연기가 아주 좋은걸로 유명하지요. 요새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듣던 마동석같은 배우라던가 검증된 김응수같은 배우들도 물론 좋지만, 검사역의 곽도원과 창우 역의 김성균은 발견이라고 할 만큼 좋은 배우들입니다. 곽도원은 영화 '황해'에서도 짧은 등장이지만 인상깊었던 기억이 나네요.


 상업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회상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플롯 자체를 복잡하게 짜지 않음으로서 이해가 잘 되고,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들은 간단한 영화적 장치나 상징들을 통해 빠르게 넘어갑니다. 영화를 평소에 즐기던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쉽게 즐길 수 있고 영화를 즐기는 사람 나름대로 찾아볼 점이 많은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들이 꾸준히 잘 되어 온게 한국 영화바닥이고 참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운대', '한반도'같은 영화들은 사실 한국영화를 말아먹고 있는 주범들이에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흥행 잘되서 돈 도는데 뭐가 문제냐, 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게 흥행이 잘되더라도 사실은 스케일이 아니라 이야기의 질로 승부해야 한국 영화는 승산이 있는데(할리웃이랑 스케일로 붙어서 이길 수 있습니까? 말도 안되는 개소리지요) 자꾸 돈을 써서 판을 키워야 흥행한다는 요상한 공식을 사람들 머릿속에 주입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겁니다. '범죄와의 전쟁'을 보면 이 와중에 고군분투 해 온 박찬욱, 봉준호, 최동훈에 이어 한국 상업영화가 또 하나의 좋은 감독을 얻어낸 것 같습니다.


 ost로 쓰였던 '풍문으로 들었소'는 오리지널인줄 알았는데 원래 함중아의 곡을 장기하가 리메이크 했더군요. 세대가 거기까지는 아니라서...


한줄평 : 간지나 보이고 싶었던 아재들의 눈물겨운 먹고살기. 


★★★★






posted by 박과장 2012. 4. 25. 22:24

 

야구팬들은 대개 자신이 야구를 보기 시작한 시점부터 10년까지를 최고의 황금기로 본다.

 - 레너드 코페트(야구 기자, '야구란 무엇인가'의 저자. 60년간 야구기자로 활동)

 

  사람들은 새로운 장르, 종목, 형식을 접했을때, 그때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과 첫사랑 비슷한 감정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야구로 말할 것 같으면 저에겐 삼성라이온즈, 양준혁, 그리고 이승엽. 그리고 힙합을 말하자면, 에미넴, 다이나믹 듀오.

 질문을 던져봅니다. 여러분에게 힙합은 무엇입니까. 10대 시절의 저에게는 힙합은 음악 그 자체였으며, 아직까지도 가장 사랑하는 음악 장르이고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동안 들어온 음악입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힙합 뮤지션이 에미넴이었습니다. 에미넴 때문에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었습니다. 

 

 

 에미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모든 랩퍼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러하듯, 그의 인생을 관통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모든 가사를 스스로 써내야 하는 랩퍼들에게 음악은 그들의 삶을 반영하므로 인생 그 자체이고, 인생에 대한 제대로 된 관찰 없이 랩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요. 빵빵 터지는 파티튠만 힙합이 아니고, 생각보다 힙합의 많은 부분은 철학이에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고, 아버지가 일찍 가정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키워왔는데 (에미넴의 주장이 맞다면) 남편이 떠나고 남겨진 상황에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에미넴의 인생을 다룬 영화 '8마일'에 잘 드러나기도 했지만 디트로이트 슬럼가가 가난에 찌들대로 찌든 곳이라 더 했을겁니다.

 그리고 집이 가난해서 장난감을 못사주다 보니 펜과 종이를 가지고 놀다가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되었고, 동네가 가난해서 흑인 아이들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힙합을 접해서 랩 가사를 쓰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 이리 저리 랩 대회도 나가면서 신통찮다가 97년에 랩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면서(랩 올림픽이라니 참으로 거창합니다만 어쨌든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한 대회였다고 합니다) 잘나가던 프로듀서 닥터드레의 눈에 띄게 되지요. 그리고 나온 앨범, The Slim Shady.

('the slim shady LP'의 타이틀곡 My Name is)

대단히 사랑받습니다. 사실 지금은 힙합이 빌보드 차트 전체를 점령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막 치고 올라오려는 중이었지요. 헌데 이 음악, 어찌되었건 흑인이 주류가 될 수 밖에 없는 음악인데 미국 사람들의 마지막 심리적 방어선 - 그래도 흑인 문화가 메인이 되기는 이르지 않냐? - 을 무너뜨리는 흑인보다 더 흑인음악을 잘하는 백인이 등장한거죠. 시대적, 문화적 상황과 들어맞는 등장시기의 운도 따랐고, 무엇보다 랩을 말도 안되게 잘하면서 거침없이 사회적 발언을 내뱉는 그에게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그 증거, 그래미상 랩 부문을 얻어냈지요.


 이 패기 돋는 젊은 랩퍼의 등장에 사람들, 다음 행보를 기다리면서도 소포모어 징크스 (첫 작품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신인이 두번째 작품을 말아 잡수는 현상)을 우려합니다. 헌데, 그 다음 앨범이 아직까지도 힙합 역사상 가장 성공한 명반 중 하나로 손꼽히는 'The Marshall Mathers LP'입니다.

(The Marshall Mathers LP의 타이틀 'Stan', 단편 소설 한권을 읽는듯한 드라마틱한 구성, 이 와중에도 맞아떨어져가는 라임들, Dido의 아련한 목소리, 적절한 샘플링, 스토리텔링 힙합의 교과서)

'stan'을 통한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이거니와 적절한 스킷 배치를 통해 얻어낸 흐름, 이로서 관통되는 앨범의 주제 의식, 버릴 것 없는 트랙, 간간히 끼어있는 유명인들에 대한 풍자, 직접적인 비판 등등. 본인의 실명을 앨범 제목으로 얹어낸 에미넴은 이미 모든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에미넴 그 자체입니다. 어딘가 꼬여있는 본인의 인격을 그대로 반영해낸다고 볼 수 있겠는데, 힙합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그 매력이 한층 강렬합니다. 특히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두고두고 설전을 벌이게 되는 대목까지. 가사가 상스러워서 이 블로그의 속성이랑 맞지 않아 자세히 언급할수 없지마는....

 이제 에미넴은 Big name, 거물이 되었고 그 다음 앨범을 내기 전까지 엄청난 부담감을 가졌다고 하지만 'Eminem show' 앨범을 통해 꾸준히 대박행진을 해나가지요. 당시의 음반 판매량 어마어마합니다. 타이틀 곡은 멜로디만 들어도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도 거의 다 알 노래, without me 였지요. 왜 당시 김기수씨가 개그콘서트에서 댄서 컨셉으로 나왔을때 다리를 쭉쭉 찢으면서 안무를 하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던....

그리고 본인의 인생을 담은 영화 '8마일'이 나옵니다. 이 블로그에서 영화에 대해 다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인의 역할을 맡아서 본인이 아니고서는 세상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 이후 그는 슬럼프에 빠집니다. 돌연 은퇴를 선언하기도 하고... 한동안 활동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 딸 헤일리가 음악하는 아빠가 보고싶다고 하는 한마디에 그는 막이 내린 뒤에 박수에 화답해 다시 무대에 선 듯 앨범 'Encore'로 돌아옵니다.

(Encore의 타이틀, 'Just Lose it'. 걍 집어쳐, 나 쉬다 나와도 이정도야, 라고 선언하는 듯한 곡)


Encore 이후로는 정말 몇년동안 활동이 없었습니다. 몇몇 단체곡의 참여 정도? 이 와중에 할리웃 파파라치들은 엄청 살이 찐 그의 모습을 찍어나르고, 대중들은 이제 그가 음악적으로 끝난게 아니냐, 추측하기도 하고. 팬들의 긴 기다림 끝에, 2009년 드디어 닥터드레와 함께한 싱글 'Crack a bottle'에서 죽지 않은 위용을 과시하며 컴백을 알립니다. 그리고 그해 5월 드디어 정규앨범 Relapse와 함께 돌아오지요. Relapse, 병이 재발하다. 그다운 앨범명의 선택입니다.

(Relapse의 타이틀 Beautiful)

이제 그는 단순히 독하다기보다는 본인의 세계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인기인의 공허한 삶에 대해서 예전처럼 무지막지한 풍자가 아니라 덤덤한 어조로 엮어나가지만 마음속에 타고있는 불은 더욱 뜨겁습니다. Relapse 앨범에 대해서는 당시에 좋으냐 나쁘냐로 논쟁이 좀 붙었었는데, 전 사실 제일 좋아하는 앨범입니다. 좀 구려지고 단순해진 부분이 있는데 이게 오래 쉬다가 나온 형의 분노랑 딱 섞여서 제가 좋아하는 색이 보이거든요. 생각보다 좀 안팔리긴 했어요. 그나마 we made you 정도가 선전했고.


 그리고 1년만인 2010년 다음 앨범이 나왔습니다. Recovery. 회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앨범입니다. 다들 Love the way you lie 들어 보셨을거 아닙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못느낍니다. 몇년 놀다가 딱 앨범 두장째에 다시 빌보드를 씹어먹는 위엄.

 

 이 와중에 첨언하자면, 에미넴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때문에 여성과 관계를 잘 설정하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사실 어머니와의 관계가 부실한 경우 여자를 성녀/창녀 둘중 하나로 대하게 되지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을 상상해보시면 됩니다. 사실 힙합이라는 장르 자체가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성적 대상으로 삼는 내용이 좀 많다보니 에미넴이 그저 그런 힙합식의 조크를 사용한다고 느낄지는 모르겠는데 그의 여성 비하는 그 과정이나 대상이 굉장히 구체적이지요.(전처였던 Kim과 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페미니스트들과 동성애자들이 제일 혐오하는 음악인이기도 하고. 이런 부분에 대해 예민하신 분들은 그의 음반중 극소수의 곡만 골라 듣거나 아에 접하지 않는 걸 권합니다.


 뭐 어찌되었건 에미넴은 저에게 되게 말잘하고 싸움도 잘하는데 알고보니 사연많고 여린 동네 형의 이미지입니다. 그 와중에 겁나 문학적이고 딸도 잘챙기고...


 야구 명언으로 시작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끝내보도록 하지요.그가 뮤지션으로서 한물 갔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휴식 끝에 싱글이 나왔을때 이제 아니라고 말했던 사람들도 있고. 거기에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실책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도 야구 경기를 완벽히 지배할 수 없다. 단지 도전할 뿐이다. 

- 루 브록(1964~1979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선수, 명예의 전당 헌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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