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박과장 2012. 4. 23. 03:07

 


 인터넷에서 쓰는 말 중에 '게슈탈트 붕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게슈탈트는 독일어로 형태, 와꾸, 뭐 이 런 뜻인데 이게 붕괴된다는 말인데... 쓰이는 의미는, 어떤 단어를 계속 반복해서 말하거나 연상하면 그게 그 단어로 느껴지지 않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실거에요. 하나의 단어를 계속 쳐다보면 이게 활자 내지는 그림으로 느껴지고 자연스레 떠오르던 의미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일.


 쌩뚱맞게 영화 리뷰에서 게슈탈트 붕괴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건, 어떤 개념을 아주 본질적으로 파고들면 애초에 우리가 막연히 희미하게 생각하던 특성들이 없어지게 된다는 이야기가 하고싶어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세요. 그 단어가 주는 느낌과 실제 여러분의 가족과의 삶을 비교해 보세요. 전자는 상징이고 후자는 본질입니다. 똑같이 느껴지시나요? 글쎄 같진 않을겁니다. 본질을 파고드는 순간 상징의 대표성은 사라지고 현실이라는 무거운 침전물이 남습니다. 찝찝하지만.


 허진호 감독은 꾸준히 멜로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전작 '봄날은 간다'가 그러했듯이, 이번에 이야기할 영화 '행복'또한 사랑이라는 일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상징은 사라지고 무거운 현실이 남습니다. 줄거리로 들어가 보죠.


 남자 주인공 영수(황정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흥청망청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클럽을 운영하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옆에서 자고 있는 여자가 거의 바뀌는, 그런 종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클럽은 망하고, 만나던 애인은 떠나가고. 결정타는 끊임없이 부어댄 술때문에 간경변에 걸려버린거죠. 이에 주변사람들에게는 유학간다고 거짓말을 해놓고는 시골에 있는 요양원 '행복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행복의 집에서 8년째 살며 스텝으로도 일하고 있는 은희(임수정). 심각한 폐질환을 앓고 있지만 굉장히 긍정적으로 살고 있습니다.(이 긍정적인 자세가 과연 좋은 것인지는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 하지요) 심하게 숨이 차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굉장히 적극적으로 사는 여자에요. 영수에게 오히려 먼저 다가가서, 연애를 제안합니다. 집칸은 남아도는 시골이니, 같이 살지 않겠냐고.

 

 여기까지는 우리가 자주 보던, 혹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전개입니다. 힘든 세상, 사랑이라는 구명줄, 서로에게 반하는 남자와 여자. 은희는 굉장히 섬세하고 영수를 잘 챙기는데다가 싹싹하고 예쁘기까지 합니다. 같이 시골에서 세간살이를 장만하면서 신혼생활 비슷한걸 즐기죠. 심지어 영수는 그녀의 지극정성에 몸도 거의 완쾌가 되고, 케어를 감사하면서, 참 행복하다, 라고 느낍니다만.


 그때 그 전에 만나던 애인 수연(공효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영수에게 이야기하죠. 이거 너 살던 모습 아냐. 너 이렇게 살아서 좋니? 이 질문을 살작 바꿔서 이야기하면, 이거 니가 알던 행복이 아냐, 너 정말 행복한거 맞니? 아, 영화의 제목은 이래서 행복이군요.


 사실 영수도 꽤 답답함은 느끼던 차였습니다. 영화 내에서 몇몇 장면을 복선으로 보여주기도 하죠. 삶의 형태가 갑자기 달라졌는데, 그 순간이 아무리 즐거워도 오랜 세월 다져진 본성은 벗어낼 수 없는 것일까요. 영수와 은희의 다툼이 생기고 영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날 버려줘, (왜냐하면) 나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아주 전형적인 죄책감 피하기죠. 사실 은희는 영수에게 참 잘해줬거든요. 그러니 은희를 버리겠다고 말하는건 영수 스스로 개새끼가 되는 길이니까. 이에 은희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내가 그여자보다 잘해줄게, 나 정말 잘할수 있어 나 진짜 잘할수 있어.

 결국 영수는 은희를 떠나고, 홀로 남았던 은희는 이내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영수는 다시 알콜중독이 되어 재활센터를 전전하다가 은희의 임종을 듣고 그녀의 유품들을 보며 울부짖습니다.


 읽는 분들에게 한번 더 질문을 드려봅니다. 은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영수는 행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희때문에 불행해서 자신을 버려달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러면 둘이 신혼생활을 즐겼던, 그때 행복이라 믿던 것들은 대체 다 뭐랍니까?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를 재료로 하는 멜로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나아가 허진호라는 감독이 그리는 말하는 사랑이라는 행위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며 눈물짓지만 결국 그 상대방이 다시 손을 뻗어왔을때 이미 마음이 식어 웃어 넘기기도 하고('봄날은 간다') 행복을 주던 그 행동들도 마음이 떠나면 귀찮고 나를 옭아매는 밧줄처럼 느껴집니다.('행복') 

 결국 대화에 비유하자면, 둘이 같은 언어를 써야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 하려고 해도 한명은 중국어를 쓰고 한명은 일본어를 쓴다면 좋은 결과가 일어나지 않겠죠.

 하지만 마음이 달아올라있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것이 그 사랑이라는 감정입니다. 이 과정에 서툰 등장인물들은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 행복의 임수정) 자신을 낮춰서, 세상에서 흔히 찌질하다고 말하는 캐릭터가 되므로서 상대방을 잡아보려고 하죠. 결과는, 현실이 그렇듯이 실패지요. 이들이 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허진호 감독의 세계 안에서의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허진호 감독의 세계와 실제 세계가 얼마나 다르냐면.... 거의 같겠지만.) 언젠가 다른 리뷰에서 허진호 월드에 대한 정리도 한번 해봐야 할듯 합니다만.

 여하간, 그래서 은희가 죽은 뒤 황정민이 그녀의 옷가지를 붙잡고 오열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사족으로 느껴집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일방성을 드러내기 위한 영화인데, 뒤늦게 죽은 그녀의 흔적을 찾는 그의 모습은 돌아온 탕자 클리쉐인데다가 논점 이탈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또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이 상황에 클리쉐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이유는 이미 많이 보고 듣고 느껴왔던 일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녀를 떠나고 다시 폐인이 되었을때 영수는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을겁니다. 하지만, 그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때부터 영수와 은희의 시간은 영수에게는 불행이었습니다. 그건 본질적으로 불행 맞아요. 영수가 원치 않는 상황이니까. '행복일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고 말하는게 정확합니다. 다만 돌아온 탕자가 된 영수가 반성해야할 것은 아, 그게 행복이었어 가 아니라 아, 그걸 행복이라고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가 되어야겠죠. 영수의 입장쯤 되면 이미 거기까지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배우들 이야기를 좀 해보죠. 황정민은 성실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배우입니다. 성실한 연기를 합니다. 행복에서도 그렇죠. 헌데 앞부분에서 흥청망청 노는 역할에 좀 어울리지 않는건, 작품이 거듭할 수록 본인의 이미지에 좀 매몰되는 느낌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직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그를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 좀 뺀질뺀질하고 유려한 연기를 한번쯤 보여줌으로서 본인 연기의 스펙트럼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에서 그의 연기가 별로라는 얘기라기보다는, 너는 내 운명 이후로 맡은 역할들에 대한 불평입니다. 


임수정은, 예쁜 배우들이 흔히 듣는 연기 못한다는 편견에 대해 어느 정도 피해를 보고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연기를 아주 잘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배우지요. 아직 어떤 배역을 맡아도 임수정이 보이니까. 대중 매체에서 CF로 자꾸 소비되는 것도 문제구요. 다만 이 영화에서는 본인에게 어울리는 배역에 잘 캐스팅 되었습니다. 폐병 환자 클리쉐에도 맞고. 이 외에 공효진 정도가 비중있는 배역인데 그나마도 얼마 나오질 않아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사실 이토록 이기적이어서, 나에게 헌신적인 이에게는 매력을 느끼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매력이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매력을 느끼려고 노력하는건 좀 우습지만, 우리는 영수와 은희를 보면서 나에게 정말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지 고민해볼 필요는 있을겁니다.

한줄평 : 찌질한거 함부로 까지 마세요. 다 그런적 있잖아요.



posted by 박과장 2012. 4. 23. 01:27

 


 살다보면 참으로 우울한 날이 있습니다. 마음먹은대로 일이 되지 않을때, 아무도 내 말에 귀기울이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때. 사람마다 이런 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여기에 리뷰를 써댈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는 저는 챙겨보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영화, 특히 한국영화에 관심을 쏟게 된 작품이 바로 이 작품, '파이란'입니다. 어쩌다 보니 영화리뷰들이 멜로로 쏠리는 것 같습니다만 기왕 요새 연애도 못하는거 멜로 영화 얘기라도 열심히 해야죠.


 


 영화 파이란의 세계는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때리는 일보다 맞는 일이 더 많은 삼류 건달인 남자주인공 강재(최민식)는 인천 항구바닥에서 그냥 성인오락실이나 지키며 살아갑니다. 새파란 애들은 능력도 돈도 없고 꼬장만 피우는 그를 개무시하죠.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유일한 꿈은 배를 한척 사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인데, 그럴 돈이 어디 있나요.


 한편 여자 주인공 '파이란'인 장백지는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유일한 친척인 이모를 보러 한국에 간신히 오는데 이미 이모는 캐나다로 떠나고 없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그녀. 중국에 다시 돌아갈 순 없으니,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하게 됩니다.


 돈이 필요했던 강재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위장결혼을 합니다. 그렇게 이 둘이 이어지게 되는데 사실 이 위장결혼이란게 서로 만나거나 하는게 아니라 대충 서류랑 인감으로 이루어지는 암거래라서, 그냥 이름만 대충 가져다 쓰는 일에 불과하죠. 서로 사진 정도만 교환합니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이를 단속하기 위해 단속반원이 같이 사는지 확인차 단속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영화 '댄서의 순정'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오죠)


 파이란은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에 살면서 이런 저런 고생을 합니다. 꽤 강도높아 보여요. 하기사 국적취득까지 해준 사람들이 그 이상으로 부려먹겠지요. 그러면서 삶의 모든 끈이 사라진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서류상으로나마 부부인 강재입니다. 한국말을 조금씩 배워가면서 강재에게 보낼 편지를 여러 통 쓰지만 막상 보낼 용기는 없습니다.


 자 여기까지만 줄거리를 요약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이상 말하면 스포일러이기도 하고... 하지만 중요한건 인생의 끝자락에 몰린 두 사람에게 남은 희망은 서로밖에 없다는 거지요. 



 '파이란'이 정말 좋은 멜로 영화인 이유는 멜로 장면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때까지 단 한번 만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상황이 둘을 서로의 마지막 끈으로 만들어요. 잡을 수 없는 끈.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에 유일한 끈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방을 죽기 전에 한번도 볼 수 없는 답답함. 그게 이 영화를 지배하는 감성입니다.

 최민식의 연기는 아무래도 연극배우 답게 기존에는 좀 캐릭터가 강했었는데(북한군 역할을 했던 '쉬리'에서 절정을 이루지요) '해피엔드'를 통해 절제하는 연기를 보여주기 시작하더니 파이란에서는 굉장히 섬세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사실 최민식이 이렇게 절절하게 멜로 연기를 하는 영화가 많지 않죠. 아니 없다고 보는게 맞을겁니다. 


 '성원', '희극지왕'등을 통해 꽤 입지를 쌓은 장백지가 이런 작은 규모의 한국영화에 출연한 것은 조금 의외입니다. 역할이 좋긴 하지요. 촬영하면서 고생을 엄청나게 했다는 후문을 들었는데, 그럴법한 장면이 엄청 많아요. 장백지의 얼굴은 참 잘 정돈된 느낌을 주는데 비극적인 캐릭터와 맞물려서 좋은 결과물이 나왔어요.


 이 외에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조연들이 많습니다. 용식 역의 손병호(최근에 많이 유명해졌죠?)의 노련한 건달 연기도 좋았고 강재의 유일한 친구로 보이는 경수 역의 공형진도 빛납니다. 


 감독 송해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많은 작품의 조연출을 했었고, 대차게 말아먹은 '카라'라는 영화로 데뷔할때만 해도 다들 크게 기대하는 감독이 아니었으나 다음 작품인 바로 이 '파이란'을 통해 크게 인정받게 됩니다.(39회 대종상 영화제 감독상 수상) 이후 '역도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으로 홈런까진 아니더라도 연타석 안타를 때려내죠. 뒤에 '무적자'로 삼진 아웃을 먹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송해성의 영화중에 '파이란'이 제일 좋습니다.


 원작이 있는 영화입니다. 철도원으로 유명한 아사다 지로의 단편 '러브 레터'가 원작입니다. 모티브는 같은데 디테일은 좀 다르고. 책이 워낙 좋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기회되시면 읽어보세요.


 리뷰 처음에 언급했듯이, 소통이 좌절되었다고 느껴서 힘들때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힘겹게 서로를 원하는데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이들이 있는데, 라면서 한번 눈물 빼고 나면 좀 개운해져요. 

  

 파이란은 강재에게 죽기 전 보낸 편지를 통해, 당신 덕분에 이곳에서 일할 수 있다. 감사하다. 당신은 참 친절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강재가 왜 이 편지를 보고 그리 눈물지었을까요.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고맙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파이란의 눈으로 본 강재는 멋지고 든든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삼류로 만드는건 후진 세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줄평 : 가끔 마냥 사람이 믿고싶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



posted by 박과장 2012. 4. 22. 01:47

첫 음악 리뷰에 대상이 박지윤인건 우연이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그래요. 박지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박지윤은 당시만 해도 그리 많지 않던 고등학생때 데뷔한 케이스입니다. 사실 음악 위주라기보다는 비주얼에 더 기댄 가수였고, 이게 꽤 센세이셔널 했었나 봅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루머 지분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었어요. 같은 고등학생이 승승장구하는게 꼴뵈기 싫었던 언니들의 분탕질이긴 하지만...


게다가 노래 못하면 가수 취급 전혀 못받던 시대에 데뷔한 터라, 가창력 논란도 많이 겪었던 뮤지션이기도 합니다. 요새는 당연시되는 립싱크 문제로도 몇번 대차게 까였을 정도니.


어찌되었건, 1집에서 '하늘색 꿈', 2집에서 'steal away' 그리고 3집에서 '아무것도 몰라요'까지 꽤 괜찮은 히트를 몇 번 건져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아티스트들의 고민 하나. 박지윤은 청순한 여고생 가수로서 이미 소비될 만큼 소비 되었던거죠. 앨범 주기가 길던 당시에 3장이나 같은 컨셉으로 먹혔다는건 이제 바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박지윤의 어머니는 기존 소속사와의 계약도 끝났겠다 엄정화의 '초대'를 히트시키면서 히트작곡가의 반열에 오른 박진영(JYP!)과 계약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온 노래가 바로 이 곡, 성인식입니다.


박지윤 - 성인식

(지금 20대-30대 초반 분들은 수학여행 장기자랑에서 한번쯤 하거나 보았었겠죠)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이 곡, 대박이 납니다. 애나 어른이나 다 따라하고. 수많은 패러디가 난무했더랬죠. 게다가 이 4집 앨범에서는 '달빛의 노래', 발라드곡인 '환상'등이 이어서 인기를 얻지요.


 다만 여기서 박지윤은 한번 더 고비를 맞습니다. 몇 년을 청순한 캐릭터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섹시 이미지로 한방에 확 굳어져 버린거죠. 모두들 박지윤 하면 섹시하다, 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게임을 좋아하는(!) 우리 박진영 사장님은 이후 두장의 앨범 역시 비슷한 컨셉을 가지고 갑니다.


박지윤 - 난 남자야


이어진 앨범 5집에서는 박지윤은 남장을 시도하면서 난 남자야, 이젠 난 남자야, 쓰레기 같은 남자야 그러니 내 마음대로 즐길거야, 라고 외칩니다. 곡 자체는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박지윤이 요새 방송에서 얘기하는 것보다는 더 히트하기도 했었구요. 본인에게는 어지간히 나쁜 기억이었나 봅니다만.. 4집이 나왔던 때랑은 이미 음반시장 판도가 달라져서, 음반이 많이 안나갔다고 해서 이 활동이 실패라고 보긴 힘들다고 봅니다. 이미 5집이 나온 2002년에 대한민국은 소리바다가 짱먹고 있었어요. 본인은 이 활동이 참 싫었긴 싫었나 봅니다만....


그 다음 앨범 6집은 타이틀 곡 제목이 '할줄 알어?' 후속곡은 'DJ'. 그런데 이미 앨범이 발표되기 전부터 심의로 논란이 되고...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언플의 제왕 박진영 님의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만... 앨범이 아에 어필을 못한건 아니지만 들어간 푸쉬에 비하면 참 아웃풋이 약했다, 이렇게 평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6집을 끝으로 박지윤은 박진영과 결별하게 됩니다. 이 결별에 대해서는 양쪽이 아직까지도 방송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다만 박지윤은 섹시 이미지를 벗고 싶었고, 당시 GOD도 제작했겠다, 노을도 꽤 괜찮게 활동하던 때고 해서 아쉬울 거 없는 박진영도 결별하게 되었다, 라고 이해하면 편하겠네요.


 이후 박지윤은 2년정도 연기자로 활동합니다. 연기자로서 훌륭했냐하면....음.. 예를 하나 들죠. 당시에 김상경과 함께 '2004 인간시장'이라는 드라마에 주연으로 등장했었는데요, ( 물론 원작은 1981년도에 김홍신이 발표했던 그 유명한 소설입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아직까지도 참 좋아합니다. 내용 자체가 키치한데 박지윤의 허접한 연기가 한층 더 극을 B급으로 보이게 해서 제대로 재미를 주거든요.

 

 이대로 그저 그런 연기자로 남나 했던 박지윤이 홀연히 2009년에서야 6년만에 7집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앨범 타이틀은 '꽃, 다시 첫번째' 그러니까 이제 다시 1집이다, 이런 얘깁니다. 앨범을 들어보면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감이 옵니다. 기존까지 박지윤이 했던 음악과 전혀 달라요. 다른 아티스트의 음악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곡들이 대부분입니다. 


봄눈 - 박지윤 

(7집 수록곡인 '봄눈'입니다. 루시드폴이 작사/작곡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트랙)


전체적으로 어쿠스틱 사운드가 돋보이는 이 앨범 내내 박지윤이라는 사람이 어떤 음악을 해오고 싶었는지 잘 보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프로듀싱 방향에 따라 아이유처럼 될수도 있었겠죠. 보컬도 기존보다 많이 향상된 모습인데... 박아셀, 타블로, 루시드폴 같은 훌륭한 뮤지션들의 지원도 빛나구요.


 그리고 올해 3월, 8집 '나무가 되는 꿈'이 나왔습니다.


박지윤 - 나무가 되는 꿈


이제 박지윤은 좋다/나쁘다, 성실하다/불성실하다의 논쟁에서 벗어난 뮤지션으로 보입니다. 루시드폴 같은 뮤지션의 가창력을 가지고 시비거는 사람 없잖아요? 


추운 겨울을 이기고 기어코 꽃 한송이가 피어나는 계절입니다. 사실 누군가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유독 모질었던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꽃들을 보고있자니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훌륭한 뮤지션으로 돌아온 박지윤 생각이 났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음악 많이 들려줄 것을 기대합니다. 연기는 안하셔도 될거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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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 Eminem (1972- )  (2) 2012.04.25
posted by 박과장 2012. 4. 21. 02:40

 

 

 


 타란티노는 새롭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새롭다는 것의 기준에 대해 다시 고찰해 봐야 합니다. 타란티노는 전에 없던 스타일의 감독인 것은 분명한데, 재밌는 것은 그 전에 없던 스타일이란 것이 기존에 있던 스타일을 이리 저리 섞어 낸 결과물이라는 거죠.
 
 사실 영화라는 산업이 어느 정도 영광을 얻어 내기 전에는 타란티노식의 작법은 출연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본이 없는데 오마주랑 패러디가 가능할 리가 없죠. 불멸의 텍스트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비트는 일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타란티노가 이런 식에 작법에 집중하게 된 건 그가 영화 덕후 출신이기 때문일거에요. 이 냥반,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영화가 좋아서 혼자 영화를 찍어대는 것도 모자라서 비디오 가게 종업원으로 취직해서 진종일 영화를 봤답니다. 역시 예술에는 제도권 교육은 오히려 한계만 주는 일일까요?

 여하간 장편 데뷔작인 92년작 '저수지의 개들'부터 그 다음 작품 94년작 '펄프픽션'까지 타란티노는 이런 비틀기에 주력해 왔습니다. 시간적 진행을 무시한 편집, 끊임없이 떠벌거리는 캐릭터, 알듯 모를듯 스쳐가는 오마주와 상징들....

헌데 그 다음 작품인 97년작 '재키 브라운'에서는 떠벌거리는 몇몇 흔적만 남겨놓은 채 갑자기 시침 뚝 떼고 꽤 점잖은 방식을 택합니다. 게다가 원작 소설도 있는 작품이고.

 그리고 나서 나온 작품이 오늘 이야기 할 2003년작 '킬빌'입니다. 사실 03년에 킬빌 vol1, 04년에 킬빌 vol2가 나왔으니까 2003-2004년 작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무튼, 97년도 이후로 그가 작정하고 본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기까지 6년이 지난거에요. 이 영화 덕후가 그간 얼마나 이 작업을 학수고대해왔으며 무엇을 준비했을지 감이 오시죠? 그리고 만들어진 킬빌은 거의 오마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패러디 영화인 '무서운 영화' 수준이에요.

 제목이 킬 빌이죠. 빌을 죽이는게 영화의 대전제입니다. 여자 주인공(우마 써먼)은 빌을 죽이려 하는데 그 이유는 빌이 본인을 죽이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뱃속에 있던 딸은 정말로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알고보니 이들은 킬러조직의 일원들이었고, 빌은 그 조직의 수장이자 우마 써먼의 애인이었는데 우마 써먼은 다른 남자랑 눈이 맞아서 결혼식을 올리려다가 참변을 당한겁니다. 그리고 이 참변에 동조하거나 방조한 조직의 일원들을 처단해 나가는게 킬빌 vol1 의 내용, 중요 조직원을 처리하며 결국 빌을 만나게 되는게 vol2의 내용입니다.

 조직의 보스를 처단하기 위해 하나하나씩 부하 조직원을 죽여간다는 내용 자체를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죠. 우마 써먼이 싸울때 항상 입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줄이 들어간 트레이닝복 자체가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고, 중요인물과 싸우게 될때마다 우마써먼의 눈이 클로즈업 되면서 사이렌 소리 비슷한 효과음이 터지는 것(이 효과음은 지금은 없어진 황금어장의 '무릎팍도사'에서 빵 터지는 장면 직전에 액션!하는 외침과 함께 사용되기도 했었죠)은 정청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손가락'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애니메이션을 뜬금없이 사용하기도 하고, 핫토리 한조가 검의 장인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그야말로 패러디, 오마주의 폭탄입니다.

 헌데 무분별한 오마주와 패러디가 적절하지 못한 형태로 사용되면 영화가 엉망이 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2년작 장규성 감독의 '재밌는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처음으로 한국에서도 패러디 영화를 제대로 찍어보겠다더니 결과물은 썩 좋지 못했었습니다. 패러디를 위해 이야기를 이리저리 꼬아내다 보니 정작 중요한 얼개는 전혀 갖추지 못한거죠. 헌데 타란티노는 내가 이바닥의 왕이다라고 선언하듯이 이 정신없는 오마주 세계를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의 우주로 엮어냅니다. 인물들이 과장되어 있지만 우리는 충분히 설득당해요. 서로 칼을 휘두르며 싸우다가 어린 딸이 들어오자 무기를 뒤로 숨기면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여자주인공과 은퇴한 여자 조직원의 모습은 실소를 터뜨리면서도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에만 우리가 설득 당하는건 아닙니다.

 사실 내용의 개연성을 물을때, 몇몇 감독들은 역정을 내면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만 영화로 찍으라는 거냐"라면서 성질을 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굉장히 게으른 핑계입니다. 실제로 일어날 일과 우리가 설득될 수 있는 일은 같은게 아닌데 말이죠.

 타란티노 감독의 배우들은 사실 손해를 좀 봅니다. 다들 그런건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캐릭터는 캐릭터 그 자체로 극 중에 존재해요. 다면적으로 인물의 깊이를 그리기보단 이야기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죠. 스티브 부세미쯤 되는 배우가 아니면 그 캐릭터 파묻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vol1 중에는 여자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the bride라고 크레딧에도 나와있습니다만, 2편에서야 이름이 밝혀지는 우마 써먼은 사실 이 캐릭터에 좀 매몰된 감이 있습니다. 주인공 자체가 사람 목 따는 일을 포도알 따는 일정도로 생각해서... 섬세한 캐릭터를 구축하기는 쉽지 않았을겁니다.

 다른 배우들은 비중 상 크게 언급할 정도가 아니어서... 빌 역할을 한 데이비드 캐러딘 정도가 기억에 남네요.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무리할 필요도 없는 역할이어서.... 그러고 보니 이 배우는 2009년에 세상을 떠났군요. 명복을 빕니다.


 타란티노의 세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른 영화 리뷰에서도 말할 기회가 많을겁니다. 다만 킬빌의 세계가 아직까지는 가장 타란티노 세계의 단면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줄평 : 쌈마이도 유일하면 스타일이 됩니다.


Vol 1: ★★★☆

Vol 2: ★★★

posted by 박과장 2012. 4. 19. 23:50

 

 

 고다르와 트뤼포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더라도, 일반 대중들에게 프랑스 영화는 친숙했던 적이 별로 없습니다. 오드리 토투에 힘입은 '아멜리에' 정도가 그나마 친숙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다만 미셸 공드리는 등장부터 난해하지 않았어요. 제대로 된 첫 장편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휴먼 네이쳐'에서부터 그는 코미디를 선택하고 (당시로서는) 젊은 감독의 재기발랄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이터널 선샤인'에서의 그는 재기 발랄함 보다는 내밀함에서 좀 더 빛나지만요.
(물론 영어로 된 미국영화를 찍는 미셸 공드리를 프랑스 영화의 기수로 이야기 하는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짙게 받은 장면 하나하나에서 이 냥반은 뼛속까지 프랑스인이구나,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러브스토리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둘이 만나서, 사랑했다가, 헤어지게 됩니다. 서로가 잊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이야기가 우리의 세상과 엇나가는게, 영화 속은 우리가 사는곳과는 일종의 평행우주여서 과학의 발전으로 특정한 기억을 지울 수 있게 됩니다. 여자가 먼저 기억을 지우고, 이를 알게 된 남자도 기억을 지우게 됩니다. 아, 그런데 기억을 지우고도 서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사실 기억을 지운다는 소재와 사랑이 만날때, 이야기는 의외로(?) 진부해지기 쉬워요. 간단합니다. 오랜만에 소월시를 한자락 읽어볼까요? "오늘도 어제도 아니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그러니까 운명이라서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가 되면 너무너무 진부해서 남자 분은 극장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함께 들어간 연인에게 이렇게 소리치겠죠. 내가 이래서 멜로 보지 말자 그랬잖아!

 헌데 이 영화, 의외로 기억을 지운다는 행위의 본질에 파고듭니다. 재미있는 상상력 하나.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끈끈하게 다른 기억들 사이에 파고 들어있다는 것. 그리고 기억을 지우는 동안 그 기억들을 여행해야 한다는 것. 남자가 기억을 지우는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는데 그 와중에 그는 트라우마와 마주하기도 하고, 여자와 함께했던 가장 행복했던 날을 기억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건 거의 '올드 보이'에 나온 인생복습과 비슷한 겁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위해 다시금 꽁꽁 싸매두었던 과거를 낱낱히 읽어내야 한다니, 세상에, 기억은 파고들수록 더 강해지는 것 아니었나요. 이 역설 속에서 남자는 여자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에 도달하지만 여자에 대한 기억은 진공청소기에 빨려들어가듯 사라지죠.

 이 외에도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에는 퇴행을 비롯해 재미있는 정신분석학적 상징들이 많습니다. 찾아보시면 재밌을 거에요. 여하간 이 과정을 그냥 나열하는 대신에 기억의 단절이라는 소재를 더 부각 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상 진행을 한번 꼬아놓습니다. 맨 처음에 맨 마지막에 들어가야 될 장면을 보여주는 거죠. 사실 현대 영화에서는 너무 익숙한 편집 테크닉이 되어버렸습니다만... 영화가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두번 '새롭게'만나는 장면을 보여주다보니 깜찍한 트릭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어요. 좋은 양념입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는 시각 효과인데, 이게 뭐 3D나 이런게 아니고... 뭔가 몽환적인 기술들입니다.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의 문제죠. 예쁜 그림도 잘 잡으면서. 영화판에서는 미장센이라고 하나요. 화면 안의 모든 것을 자기 뇌 속에서 통제된 그림으로 잘 표현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의 영상을 보고 뷔욕이 괜히 데려다가 본인 뮤직비디오를 찍게한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원안을 미셸 공드리 감독이 제공하긴 했지만 이를 훌륭하게 담아낸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도 칭찬할만 합니다. 워낙 '어댑테이션'이나 '존말코비치 되기'에서 좋은 시나리오로 인정받은 작가입니다. 어찌되었건 미셸 공드리감독의 모국어는 프랑스어기 때문에, 영어로 된 영화를 이렇게 만들어낸데에는 그의 시나리오가 중요했을겁니다.

 짐 캐리가 '마스크', '에이스 벤츄라'에서 어마어마한 코미디 연기를 선보일때, 우리는 그게 그의 한계인 줄 알았었죠. 사실 엄청 웃겨서 그렇지 생각보다 잘생긴 배우기도 합니다만. 그는 이 한계를 '트루먼쇼'를 통해 박살냅니다. 다들 보셨잖아요? 사실 트루먼 역할이야말로 모든 남자배우들의 로망 중 하나일거에요. 세상 전체가 짜고 한명을 속이는데 그 억울함을 표현해 낼 기회라니. 그런데 트루먼 캐릭터 자체도 그렇고 바로 전작까지는 코미디 위주의 역할을 했었던 짐 캐리여서, 약간은 코미디 기가 남아있었는데, 이터널 선샤인의 그를 보면 눈물부터 납니다. 세상에 전혀 웃기지가 않아요. 이런걸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 죽이는 연기라고 할 수 있겠죠. 극찬하지 않을 수 없는 연기입니다.

 케이트 윈슬릿 또한 타이타닉의 이미지때문에 의외로 손해를 좀 봐왔던 배우였죠. 사실 성격파 배우에 가깝거든요. 아주 예쁜 얼굴도 아니고...어쩌다 타이타닉의 히로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터널 선샤인에서 드디어 몸에 맞은 옷을 입은 사람 같습니다. 머리 색 하며, 약간 현실에서 붕 떠있는 듯하면서도 충동적인 캐릭터. 어떻게 보면 연기하기 편한 축에 드는 역할입니다마는 그래도 호연을 폄하하긴 쉽지 않을겁니다.

 어떤 기억은 사람을 지탱해서 살아가게 하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사람을 좀먹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모든걸 품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제의 나를 뿌듯해하거나 혹은 어제의 나와 싸우거나 그 중간쯤에 서있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기억을 지운다고 그 전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는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영화의 말미에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고백하고 여자는 우리가 또 그렇게 되면 어떡하냐, 자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때 남자주인공의 한마디, 상관 없어요. 되묻는 여자. 상관 없어요? 네, 상관 없어요.

 그렇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서 미워하게 될지 걱정하는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한줄평 : 기억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사람도 있습디다.

 

★★★★

 

 

posted by 박과장 2012. 4. 19. 03:25

   


 완성되지 못한 사랑은 잘못을 전제로 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이 없다면, 혹은 그 잘못을 참아줄만한 용기가 있다면 우린 지금 다 학부모일겁니다. 건축학개론은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첫사랑은 어디에서 잘못되었던 걸까. 지금은 잘 살고 있을까.


영화의 시작, 첫사랑이었던 서연은 15년전의 남자 승민을 찾아옵니다. 이건 과거에 둘이 했던 사소하지만 중요한 약속의 내용이기도 하죠. 건축을 전공하는 승민에게 서연은 집짓기를 맡길거라고 했거든요. 여기에 둘의 과거가 오버랩됩니다. 



놀랍게도 서연-한가인은 과거에 수지였고, 승민-엄태웅은 과거에 이제훈이었죠. (이제훈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겁니까..) 이게 중요한건 아니지만. 여하간 과거에 그들은 아주 순수했으며, 서로가 첫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통해 둘의 사이는 틀어지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이게 다에요. 우리에게 분명 있었던 일입니다.


 다만 이 영화는 감독이 말했듯이 남자들에겐 반성문입니다. 현재시점, 엄태웅의 연인인 고준희는 엄태웅이 본인의 첫사랑을 '썅년'으로 묘사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썅년이라고 불렀던 사실 자체를 반성이 필요하다는게 아니고, 왜 서연을 썅년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냐는거죠. 서연이 썅년이여야만 본인의 행동이 이해가 되니까. 사실 승민의 행동은 진상을 알게 되었을때 본인이 입게 될 상처를 회피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상처받기 싫어서, 첫사랑을 떠나고 떠나보내고, 썅년으로 만드는거죠 머릿속에서. 그리고 이 사실들을 앞에다가 늘어놓았을때, 그걸 바라보는 관객들은 서연을 썅년으로 생각합니까? 그건 아니죠. 그렇기에 이 이야기가 반성문이 되는 거죠. 남자 아이들은 스무살에 얼마나 설익었는지, 그래서 얼마나 설익은 행동을 하게 되는지. 


 원래 남자아이들이 전두엽의 발달이 늦어서 상황 판단이나 대처가 여자아이들에 비해 많이 늦는다고 하더라구요. 게다가 사랑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면, 백프로지요. 제대로 행동할 리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리뷰에다 주장할런지 모르겠지만 연애는 좀 많이 해봐야 됩니다. 제대로 된 연애라는건 많은 경험에서 나와요. 좀 이야기가 새긴 했지만 본론으로 돌아가서. 첫 씬에서 서연을 반기지 않고 오히려 모른척하는 승민의 모습도 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겁니다. 사실 엄태웅은 전작 '시라노 연애 조작단'에서도 비슷한 과거가 있는 인물로 나오죠. 본인이 잘못했지만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굳게 믿어야 하는, 그런식으로 죄책감을 덜어내는. 감독들은 엄태웅의 얼굴에서 나이를 먹어도 철들지 않는 유년기의 남자의 습성을 찾아낸듯 합니다. 


 이야기는, 플롯은 좀 나뉘어 있지만, 사실 단순한 두개의 흐름이지요. 만남->헤어짐->다시 만남->다시 헤어짐의 구조에요. 하지만 관객들은 왜 건축학개론을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라고 이야기 할까요? 세상에, 모르셨구나. 원래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 헤어지거든요. 이건 복잡하게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세세하게 이야기 해야 합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복잡할 수가 없습니다. 복잡해서도 안되구요. 그 본질이 만남과 헤어짐에 있고 모든 감정들이 거기에 종속되거든요. 건축학개론이 사랑받는 지점이 있다면 그 세세함일겁니다.

 

 배우들 이야기를 해볼게요. 사실 저는 드림하이를 보면서 정말 예쁜 수지가 연기는 안했으면 했습니다. 드라마 연기의 한계라던가 감독 지도의 문제가 있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보면서 하, 저건 아니지 싶은 순간이 한 둘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건축학개론에선 주연이라는 얘기를 듣고 이 영화를 볼지 많이 망설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연기할 거리가 많은 역할이 아니어서,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는 편이 훨씬 중요한 역할이어서 오히려 그 예쁜 외모덕을 많이 봤어요. 원래 추억은 좀 미화되야 제맛이거든요. 이래서 추억에 관한 이야기를 할때 예쁜 배우가 중요합니다. 

 

 이제훈의 연기는 칭찬해야겠지요. 좀 뻔하고 클리셰가 많은 캐릭터라는게 못해도 티가 안난다는 장점 동시에 잘해봐야 티도 안난다는 단점이 있는 것인데 이제훈은 잘하는 티가 날 정도였어요. 원래 눈이 좋은 배우라는건 전작 '파수꾼'에서 알고 있었지만, '고지전'에서는 너무 눈에 의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본격적으로 발성도 쓰고 합니다. 배우로서 어려운 지점일텐데 잘 잡아냈어요.


 엄태웅은 그냥 우리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엄태웅입니다. 막 소리 지르면서 '엄포스'소리 안들어도 이제 어떻게 해야 잘하는 배우인지 아는 것 같아요. 예능에서 그렇게 순한 캐릭터가 연기 저렇게 해내는 것도 재밌죠. 이제훈하고 본질적으로 같지만(같은 사람이지만) 세상에 의해 변한 느낌을 잘 보여줘요. 책이 좋아서기도 하겠지만.

 

 사실 한가인 연기에 대해서 코멘트들이 분분한데, 저는 잘했다에 한표 던집니다. 원래 외모가 특출난 배우들이 똑같은 연기를 해도 더 손해보는 지점이 있어요. 세상에, 인형같으니까. 인형에 현실성이 없고, 영화 연기의 중요한 덕목중의 하나가 리얼리티인데 좋아보이기 힘들죠. 아 물론 저도 한가인이 욕할때는 좀 오그라들었습니다.


 주연 네명 외에 언급해야 할 배우가 있다면 '납뜩이' 역할의 조정석입니다. 뮤지컬계에서는 이미 스타급이었죠. 깎아 내리고자 하는 건 아니지만 캐릭터성이 강한 연기라 더 잘하게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작품에선 좋았지만 아직 속단할 배우는 아닌 듯 하네요. 최근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 '더킹 투 하츠'에서 연기가 꽤 괜찮은 것 같으니 주목해서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용주 감독은 '봉테일' 봉준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드는데에 반대했다고 하던데, 음... 영화는 어찌되었던 잘 되었습니다. 사실 이용주감독의 데뷔작 '불신지옥'은 현장에서 '책'을 그렇게 잘 썼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작품입니다(영화계에서는 시나리오를 주로 책이라고 부릅디다). 연출은 그에 좀 못미친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역시 직접 쓰고 찍은 건축학개론은 좋은 평을 듣고 있습니다.


 생각보다는 영화내에 추억팔이라고 불리우는 행위들이 좀 적습니다. 7080 코드를 그려낸 '써니', '말죽거리 잔혹사', '품행 제로'같은 영화들을 보면 추억을 재현하는데에 아이템적 접근이 굉장히 중요하지요. 왜냐하면 영화가 나온 시점과 영화가 그리는 시점 사이에 갭이 좀 크거든요. 아이템을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니까 아이템에 대한 세부 묘사보단 그냥 아이템을 제공하는 것 만으로도 관객에게 회상 또는 생경함을 주기에 충분하거든요. 하지만 건축학개론이 그리는 15년전은 아직은 그렇게 먼 과거는 아닙니다. 피씨통신을 그냥 제시하는 것 만으로는 큰 회상거리가 못되요. 지금도 메신저 혹은 스마트폰으로 다들 채팅은 하는 걸요. 그러니까 그때의 분위기를 잘 이야기하는게 더 중요하죠. 영화 내내 흐르는 음악 <기억의 습작>이 그런 예구요.


 완성되지 못한 사랑이 실패한 사랑은 아닐겁니다. 서연과 승민은 서로의 기억때문에 앞으로 그 전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거구요. 우리 삶에 그렇게 서투르지만 몰두했던 순간조차 없다면 어느날 좀 슬프지 않겠어요.


한줄평 : 돌아가지 않아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이름 첫사랑.


★★★☆


posted by 박과장 2012. 4. 19. 02:52

 

  좋은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요? 이 질문은 사실 좋은 삶은 어떤 삶이냐, 와 동급일만큼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생각을 많은 영화를  통해 바라보게 되지요. 뭐가 좋은 건지 일방적으로 고르는건 인터넷 특유의 '취존'정신에도 위배될 뿐 아니라, 글쓰는 이의 양심에 찔리기도 합니다. 사실 리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작품에 애정이 있어야 되죠(혹은 분노거나..)그래서 이 영화 리뷰들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영화, 내지는 제 주변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에요.


  이번에 다룰 영화는 2010년작, 만추 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원작 영화가 있고, 그 이외에도 먼저 리메이크한 다른 작품들이 있습니다. 많은 비교대상을 가지고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감독, 몇 배는 더 부담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 투자를 받아가면서 이 이야기를 또 다시 은막 위로 불러내는 일은, 이야기에 그만한 매력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죄를 지어 감옥에 있는 여자가, 우연한 기회에 하루를 감옥 밖에서 보내게 되는데, 그때 만났던 남자와 단 하루지만 잊지 못할 사랑에 빠지는 겁니다. 인생의 빛나는 단 한 순간. 그 순간의 사랑을 기억하며 기약한 장소에 여자는 다시 나오지만, 모종의 사연이 있는 남자는 그 자리에 나오지 못합니다. 여자는 쓸쓸한듯 허탈하지만 역시 이 또한 인생의 한 부분임을 알았기 때문인지, 가볍게 웃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힘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 저는 말하고 싶네요. 기본적으로 단 하루의 자유라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만약 삶의 모든 의무를 저버린 채 하루의 자유를 준다면 어떤 일을 할건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고백하거나, 못먹어보았던 음식을 먹거나, 만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게 될겁니다. 말하자면 이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평소의 루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무감을 심어줍니다. 그런데 그 벗어난 삶의 부분중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건 뭘까요? 역시 사랑이겠지요. 이렇듯 특별하게 보일 수 있는 이야기는 사실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힘있는 이야기에요.


 같은 이야기를 다루었던 지난 작품들과는 다르게, 2010년작 만추가 다루는 특별한 지점은 다른 언어, 입니다. 주인공 둘은 영어로 소통할 수 있지만, 이는 둘의 모국어가 아닙니다. 각자의 모국어로는 소통할 수 없지요. 이 상황은 여자주인공인 탕웨이가 시장 한켠에서 본인의 사연에 대해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남자주인공인 현빈이 좋아요, 나쁘군요 이 두가지 대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그 장면에서 현저히 드러납니다. 둘은 다른 언어만큼이나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다른 언어 덕분에 하지 못할뻔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서로의 설익은 말보다는 눈빛에 집중하게 되지요.


 이야기에 대해 더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각자 이야기를 접하시고 느낄 몫이라고 봅니다. 이제 감독과 배우들에 대한 얘기를 해보지요.



 2010년의 만추를 만든 감독 '김태용'은 이미 한국 영화계를 두 번 들었다 놓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은 99년작 여고괴담2, 그 다음은 2006년작 '가족의 탄생'을 통해서였지요. 여고괴담2는 흥행 영화의 속편을 아주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촬영했다면, 가족의 탄생은 익숙한 작법으로 독특한 영화를 찍었습니다. 여고괴담2는 퀴어무비인데다가 - 대놓고는 아닐지 몰라도 - 공포영화의 속성을 빌려서 그 나이 또래의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가족의 탄생은 시대적 흐름이 바꿔놓은 가족 형태에 대한 영화라고 단순하게 이야기 할수도 있지만 가족내 권력 이동에 대한 아주 핵심적인 보고서라고 볼 수도 있을겁니다. (개인적으로 고두심이 엄태웅과 연인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겁니다.) 두 영화의 그나마 공통점은 페미니즘을 알게 모르게 이야기하는 정도일겁니다. 그가 만추를 만든 것은 예상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놀라운 일도 아니에요.

 

 현빈의 연기는, 아주 내밀하게 우리가 알고있던 현빈과 다르지는 않지만, 그는 충분히 '훈'같습니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배우의 재능보다는 캐스팅한 사람의 능력이 중요한 영역이기도 하지만요. 특히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중년의 여인과 마주할때 연기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탕웨이는 최고의 캐스팅이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너무 아름답다는 점만 빼면 애나 역할에 100% 적합하다고 봐요. 조금 덜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주인공 캐릭터라고 봅니다만, 어찌됐던 탁월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특히 '왜 이 사람 포크를 썼어요?" 하며 울부짖는 씬은, 아, 환장하게 좋아요.


 잘만든 영화입니다. 영화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저이지만, 김태용 감독은 이게 소품이지만 대작이다, 라는 점을 잘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좋은 이야기를 망치지 않아서 영화팬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줄평 : 간절할수록 더 원한다. 팔다리 묶인 사랑의 처연함


★★★★